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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4.19혁명, 55년간 돌본 산화의 넋총탄 고문으로 숨진 부부열사묘 지킨 중앙대 동문 김정일 씨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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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7  16: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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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이른 아침 검은 양복 차림의 노신사는 국립4.19 민주묘지 제 1묘역에서 묘비를 쓰다듬었다. 민주화를 부르짖다 채 피지도 못하고 산화해갔던 친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날씨마저 이들의 영혼들을 달래는 듯 흐린 잿빛이었다.

4.19 묘역에서 유일하게 이름 두 개가 나란히 쓰인 묘비, 김태년(金泰年) 서현무(徐鉉戊). 묘비 앞에 꽃 두 송이를 놓은 노신사는 나직이 속삭였다.

“벌써 55년이나 지났구려” 묘비를 찾아온 노신사는 중앙대 58학번 출신인 김정일(75)씨다. 김씨의 가슴에는 두 개의 4.19가 존재한다. 1960년 4월19일 동지들과 거리에서 투쟁하며 자유민주주의를 되찾은 환희의 날과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95년 4월 19일 영혼결혼을 한 김태년군과 서현무 양을 합장시킨 날이 그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랄까.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로 시작된 민주화는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민심은 극도로 동요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서울 종로에서 부정선거를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 자유당이 조종한 것으로 보이는 정치폭력배들에게 습격당한다.

이 때문에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던 4월 19일의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경무대 앞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결국 총소리가 울렸다. 경무대로 가는 길목에 포진한 경찰들이 불과 10미터 앞의 시위대들을 향해 사격을 가한 것이다.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은 흩어졌다 다시 대오를 정비하면서 경무대를 향했다. 그야말로 자유를 향한 죽음의 행진을 방불케 했다.

이날 김태년 열사는 ‘부정선거는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며 거리시위를 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서현무 열사는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대 선봉에 섰다. 서 열사는 신광여고 시절에도 연대장을 할 정도로 재원이었으며 변호사가 그녀의 다부진 꿈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슴을 미래에 대한 열정으로 부풀어 있었다. 이렇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학우들과 같이 자유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현무는 중대신문에 기고한 4.19 수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중앙대 학생들이 내무부 앞에 도달했을 때 경찰들이 정면으로 총부를 대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것을 단념한 데모대는 10미터 간격을 두고 앉아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때 한 학생이 태극기를 펴들고서 ‘이 국기는 대한민국 태극기이며 여기에 총을 겨누는 자는 반역자’라고 외쳤지만 경관들은 총을 쏠 기세를 멈추지 않았고, 뒤쪽(시청쪽)에서 발포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우리를 경비하던 경관들도 별안간 발포하기 시작했다. 놀란 학생들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깨어나 첫소리, “홀어머니께 난 장있다고 전해주소”

총탄 하나가 바로 손끝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 서현무 열사는 손도 펴지 못한 채 오므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순간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휘어 잡혀야 했다. “이 깜찍한 년이 달아나지도 않아!”하는 소리와 동시에 총대로 목덜미를 후려갈겼다. 그 순간 서 열사는 아찔함과 머릿속에서 어떤 뜨거운 액체 하나가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을 뜨고 보니 두 다리에 두 사람, 두 팔에 두 사람, 머리채 한 사람을 포함해 다섯 명의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달아나지 않을 테니 내려줘요”

그제서야 경찰들은 그녀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왔다. 이를 악물며 신발도 없이 겨우 몇 발자국 걷다가 끌려들어 간 곳은 수위실이었다. 그리고 2층 수사과로 넘어가 신원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서현무가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경찰은 잠깐 누워 있으라고 하면서 심문도 간단히 끝마쳤다.

신원조사와 심문이 끝난 후 옆방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인원수가 점차 늘어났다. 나중에 들어온 중앙대생에게서 남자 4명 여자 1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모두 침통해 했다. 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해하면서 다음 심문 때 주모자는 절대 모른다고 말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서현무는 세시 반경 사찰계라고 생각되는 곳에 불려 나와 문초를 받았다. 경사는 여러 가지를 물어보면서 조서를 작성했다. 대답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 마음대로 기입하기도 했다.

“주동을 대라”

“우리는 주모자 없이 행한 데모이며 주모자가 있다 해도 이름도 모르고 얼굴을 봐야 알겠다”고 대답하자 경찰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며 깊이 반성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감방으로 수감됐다. 눈물이 흘려 내렸다. 하나뿐인 딸의 소식을 몰라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실 어머니 모습을 그려보니 불효자식 하나만 믿고 사는 어머님이 가엽기까지 했던 것이다.

   
▲ 중앙대 4.19혁명의 주역들
‘나도 진작 집으로 갔으면…’ 비겁해 보였지만 숨길 수 없는 심정이었다

처음으로 애걸을 했다. ‘여보세요 우리집에 연락을 주세요. 나는 여기서 얼마동안 살아도 좋으니 홀어머니께 안부나 전해주세요. 아무 일없이 평안히 있다구요’ 목매인 소리를 외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제껏 생각해보지도 않은 후회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진작 중앙청 앞에서 친구들과 그냥 집으로 갔으면…’하는 자신이 비겁해 보였지만 숨길 수 없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서현무는 고문후유증으로 2개월 30일 후 병상에서 숨졌다. 김정일씨는 “그녀가 홀어머니와 먼 친척 두 사람, 고교 시절의 친구 한 사람만이 고결한 젊은이의 쓸쓸한 임종을 지켜봤다”고 전했다.

이렇게 숨겨간 사람들은 4월 19일 날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일 씨는 영혼부부의 만남과 이별은 너무 슬프다고 했다. 김태년 군의 집안은 전통적 유교 집안이었다. 이 때문에 김태년 군이 민주화를 외치다 총각으로 죽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제사를 지내기가 곤란했다. 그의 아버지 김윤현 씨는 이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으며 안타까웠다. 태년 군의 할아버지의 완고한 어른이었다.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어른으로 대접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생각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영혼 결혼이라도 올려줘 죽어서나마 어른으로 대접해줘야 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궁리 끝에 4.19 때 희생된 여학생 중에서 물색해 영혼 혼례를 치러 주기로 했다. 4.19혁명 유족회를 통해 신부감을 찾던 중 마침 김태년과 같은 중앙대학에 나이도 비슷한 서현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결혼에 이르게 된다.

마침내 1960년 11월 11일 두 사람은 조계사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김태년의 음성 선산에 합장됐다. 이때부터 4월 18일이면 김태년의 집에서 두 사람의 제사를 지내게 됐다.

그런 후 1993년 5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유리 4.19묘역이 단장됐다. 이들 열사 부부는 이곳으로 이장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부부로서 33년 동안 한자리에 누워있던 두 영혼은 서로 떨어지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씨는 두 사람의 합장을 위해 발 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사실 생전에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친 동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과 빚진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김 씨는 “인생에서 아주 중요했던 시절에 함께 목숨을 걸고 거리에 나섰던 동지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영혼이나마 위로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순수함으로 이성과 저승을 잇고 싶은 간절함

두 사람을 합장시키기 위해서 먼저 언론과 관계부처에 그 실상을 알렸다. 그러자 국가보훈처에서 뒤늦게 그 뜻을 알고 합장을 허락하고 묘비 뒷면에 비문을 직접 지어서 새겼다.

김 씨가 매주 두 사람의 묘비를 찾는 일이 올해로 어느 덧 55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뜻밖에도 김씨는 묘역 입구에 지난해 5월 오석(烏石)으로 만든 묘역 배치도에 오류를 발견하게 됐다. 서현무 열사가 안치된 묘역은, 1묘역-B43묘소부터 101묘소까지 선명하게 안치된 열사들의 이름이 각인돼 있다.

그런데 99묘소에 합장한 김태년, 서현무 열사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김태년 열사만 있고 서현무 열사는 아예 빠져 버린 것이다.

고귀한 피를 뿌리고 산화한 그 이름을 관리자들의 소홀로 빠졌다는 것에 그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순수함으로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밀려왔다. 사실 경찰의 고문으로 병고에 시달리다 7월 2일 사망한 서현무과 김태년의 영혼부부의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면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김정일 씨는 4.19 국립묘지관리소와 서대문에 소재한 4.19혁명희생자 유족 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흠결 없는 새로운 묘비가 세워지도록 발 벗고 분주히 나섰다. 관리소는 김태년 이름 아래 ‘서현무’를 땜질하듯 새겨 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일에 김 씨의 마음은 편안하지가 않았다.

이런 임시방편은 열사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누가 참배를 와서 보더라도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전국 유일의 영혼결혼 열사 부부의 사연을 소개하는 안내 비문을 별도로 세울 것을 요구하고 싶기도 하다.

이들의 애절한 사연이 알려지면 국립4.19민주묘지의 상징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김정일 씨는 서현무가 병상에서 쓴 수기 ‘우리를 죄인처럼 나는 이렇게 연행 당했다’와 김태년의 시 ‘선제(先題)’와 수필 ‘여승(女僧)’을 유고집으로 낼 예정이다.

이처럼 민주화를 위해 꽃다운 생명을 버려야 했던 두 사람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을까. 자유를 향해 죽음도 불사하고 민주화를 남겼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어떠한지 새겨볼 일이기 때이다. 고결한 생명으로 뿌려진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제 자유방임인 천민민주주의를 극복하고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세워야 할 때가 아닌지를…

한편 김정일 씨는 전 의정부우체국장 재임 시 남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일을 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의정부라는 지명이 조선 초 3정승 6조 판서가 모여 국사를 논의한 국정 최고기관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정승이 머리에 쓴 사모를 로고로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이를 우체국의 각종 상품에 부착하는 등 ‘부대찌게’와 ‘미군부대’에 뺏긴 도시 이미지를 되찾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에 시에서는 1999년 10월 8일 역사 속의 의정부를 재조명하기 위해 태조와 태종의 왕실행차 재현했으며 이듬해 의정부시 이미지 캐릭터로 조선시대 정승의 모습을 어린아이의 형상인 ‘의돌이’로 정하기도 했다.

또 강릉우체국장 재임 시에는 우편엽서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강릉8경’을 선정, 전국에 알리는 공헌도 세워 시민들로부터 강릉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김 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체신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지난 2000년 경기도 의정부 우체국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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