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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대의 무역왕 최봉준12세 때 아버지 잃은 고아, 동아시아를 주름잡다
주엽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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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05  11: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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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최대 무역왕이자 현금왕으로 군림했던 인물. 1890년대 함경도 성진항에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최봉준이다.

구한말의 조선 부자는 왕실재산을 관리하여 거부가 된 이용익, 명성황후의 친척이었던 민영휘, 동아일보를 창간한 호남의 지주 김성수 등인데 이용익과 민영휘는 재산이 1000만 원대였고 김성수는 500만원 정도였다. 이에 버금하는 연해주에서 1000만원대의 재산을 가진 부자가 최봉준이다.

그는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나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됐다. 가까운 친척 하나 없게 되자, 그는 계절 노동자들을 따라서 두만강을 건너게 된다. 연해주로 이주한 이들은 삽과 곡괭이로 농토를 개간하여야 했기 때문에 고생이 막심했다.

최봉준은 겨울에는 러시아인이 사는 도시나 마을에 가서 품삯을 벌었다. 하루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가 허허벌판에서 눈보라를 만났다.

계속 걸어도 광대한 눈밭뿐이었고 추위는 살을 에는 듯했다. '여기서 잠들면 죽는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는 어느 새인가 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러시아의 구족인 야린스키의 집이었다. 야린스키는 그를 잘 돌보아 주고 자신의 집 농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최봉준은 성실하게 일했으므로 야린스키의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없던 야린스키는 최봉준을 아들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가 73세로 숨을 거둘 때 19살인 최봉준에게 그의 재산과 '처세 10조'를 남기게 된다.

최봉준이 맨 먼저 손을 댄 것은 러시아 농가에서 사들인 달걀을 함경도에 가져와 파는 일이었다. 이미 러시아 사람들은 이른바 개량종 양계법에 따라 달걀을 대량생산하고 있었다. 그 달걀은 많은 노동자 유민들의 비상식량이기도 했다.

달걀을 함경도까지 가지고 가서 팔면 그 이익이 두 배가 넘었다. 달걀 판매로 기반을 다진 다음 최봉준은 소장사로 나서기 시작한다. 최봉준은 함경도 성진(김책시)을 중심으로 원산‧경흥‧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홍콩‧상하이‧일본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러시아‧일본‧중국에서 각종 수입품, 특별히 비단이며 광목‧석유를 들여와 함경도 일대는 물론 부산에서 동해안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지배하는 거상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는 화물선을 러시아에서 들여와 부산과 인천‧마카오‧홍콩‧상하이‧대만‧일본‧블라디보토크까지 취항하면서 온 바다를 호령했다.

최봉준은 1906년 4월 일본에서 1400t짜리 화륜선 후시미마루를 사들였다. 이 후시미마르는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동양의 바다를 주름잡은 일본 군함 가운데에서도 거함으로 곱힐 정도였다. 그리고 이 배를 원산‧성진‧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해 북부 해안에서부터 러시아 연안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 운항을 했다.

최봉준은 다달이 1000여 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수출했다. 소 한 마디당 40원으로 쳐 연평균 생우 수출량만도 50만원을 넘어선다. 1년에 생우 수출고 50만 원이상을 올린 그는 소장사만 한 것이 아니라 광목과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을 취급해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당시 함경도 지방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흘러가는 계절노동자만도 한해 몇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최봉준의 배를 타고 건너다니고 했다. 최봉준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조선 사이 모든 수출입을 독점한 것이다.

이처럼 최봉준이 사업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중에는 그의 남다른 고향사랑도 한 몫을 했다. 그가 살길을 찾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러시아로 건너간 것이 12세 였다면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 45세였다. 조국에 돌아온 뒤에는 고향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까지 세심하게 마음을 썼으며 조선 사람들을 잘 대해주었다.

몇 천만금을 거머쥐고 금의환향한 그였지만 새로 둥지를 튼 성진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남녀노소를 떠나 성심껏 허리굽혀 인사할 정도로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부자가 되어서도 그 덕을 잃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최봉준의 일이라면 조선 사람 누구나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와주려했다.

 

해조신문> 창간, 일본 제국주의 침략 규탄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

 

최봉준은 대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마음속으로 통곡하며 시베리아에 한국민회(韓國民會)를 조직. 재정적 후원을 맡았다.

그의 남다른 기백과 대인다운 면모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 비용을 모두 대줄었을 뿐만 아니라 유족의 생계비를 남모르게 후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봉준은 이 재판의 변호사 비용의 거액을 거침없이 선뜻 내놓았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는 독립투사들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었다.

하루는 한 밤중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복ㅁㄴ을 한 사나이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최봉준은 직감적으로 여느 강도가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성재 선생께서…."

"얼마가 필요한가?"

최봉준의 첫 마디에 놀란 것은 오히려 복면한 사나이였다. 고향 청년으로 일찍이 항일운동에 나선 성재(誠齋) 이동휘가 보낸 사람이었다. 아직 스무 살도 채 안 된 앳된 얼굴이었다. 청년 이동휘는 지난해 고향 함경도 단천 출신이라며 다부진 얼굴로 찾아온 일이 있었다.

성재 이동휘는 훗날 상하이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내각에서 국무총리를 맡는다. 최봉준은 금고를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돈다발을 꺼내 젊은이 앞으로 내밀었다.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서 무엇이 아깝겠나. 성재 선생께 독립 군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주시라고 말씀드리게."

1908년 2월 26일 최봉준은 '해조신문을 창간한다.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조선말로 발행된 일간신문이기 때문에 그 의의가 컸다. 이 신문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이날에 목 놓아 우노라'는 명문으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 황성신문사 사장직을 물러난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했다.

발간사에서 '일반 국민의 보통 지식을 계발해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완전하게 하기로 목적함'이라고 밝힌 것처럼 애국독립투쟁을 고무하는 데 진력을 다했다. 그리고 이 신문은 서울‧원산‧인천‧평양에 지국을 설치하고 원산항을 거쳐 국내 방방곡곡으로 배포했다.

매호마다 격렬한 항일구국 논설을 실어 애국지사의 피를 들끓게 하고 일본제국 통감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해조신문'이 국내에 흘러들어와 조선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자 놀란 일제 통감부는 1908년 4월 신문지법을 뜯어고쳐 국내 판매를 금지하고 '해조신문'을 압수했다. 이 때문에 1908년 5월 26일자 제 75호를 끝으로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폐간되고 만다.

 

사업가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더 무거운 법

 

최봉준은 1899년 성진항에 조선의 건축물 가운데 최초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양관을 짓는다. 조선에는 2층 양관을 지을 수 있는 목수나 미장이가 없어서 일본에서 목공‧석공‧벽돌공 100여명을 불러들였다. 벽돌이나 건축자재는 모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들여왔다. 2층 60여 칸이었으며 그 밖으로 둘러친 회랑 상점은 100여 칸에 이르렀다. 그 회랑 가운데에 다시 철고를 지어 60여 칸에 이르니 건물의 총 칸수는 220칸이 넘었다. 바다를 당당하게 품어 안듯 우뚝 세운 건물은 웅장한 성처럼 보였다.

친구 한익성 웬만큼 돈도 벌었고 이렇게 거대한 건물도 마련했으니 이제 편히지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에게 권하자 최봉준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사업은 분명 내가 일구어낸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있으므로 나 하나 편하겠다고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나. 사업가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더 무거운 법이네. 내가 없어져 회사가 잘못되면 내 회사에 투자한 많은 투자자와 고객, 또 수많은 고용원들은 어찌 되겠나. 나는 이들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내가 태어난 조국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네."

최봉준은 1906년 엄청난 재산을 블라디보스토크의 계동학교 설립에 쾌척했다. 그 전에도 연해주 한인촌에 학교를 여럿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언론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엄청난 자금을 투자해 '해조신문'을 창간하고 블라디보스토크 한국민회의 기관지 '대동공보'의 운영자금과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의 활동비와 군자금도 대주었다. 이처럼 최봉준은 조선민족의 계몽활동과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의 노력을 다해갔다.

1910년 8월 최봉준은 조선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이상설, 유인석, 김학만 등이 시베리아 신한촌에서 한인들을 모아 조직한 성명회의 선언서어ㅔ 서면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열강의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극동정책 실시를 호소하는 데 적극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자금지원에도 적극 나섰다.

최봉준은 조선독립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지만 안타깝게도 1917년 9월 11일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최봉준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지금도 여운을 주고 있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이 땅의 자연적 약속을 깨우치고 역사적 사명에 눈을 떠야 한다. 지금껏 작은 이익에 집착, 서로 헐뜯는 기질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망하게 했음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 조선 백성이 살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옳게 깨달아야 한다. 조선은 오직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반도가 아니다. 아시아 대륙 전체의 무궁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귀고리다. 신이 아시아를, 더 나아가 온 세계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조선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레이스로 삼면이 둘러싸인 칠보이고 자수정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게 깎여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보석 같은 나라 조선이 또 있겠는가. 이제 우리가 잊어버린 바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깨달아, 그 가치를 발휘하고 지위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다와 더불어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러싸인 조선 젊은이들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조선을 바다에 우뚝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사람만이 오늘의 조선을 구해 낼 수 있다. 남방 대양으로 거침없이 나아가 국민 의기를 드높이고 국가경제를 일으켜, 조선 민족의 성실함과 총명함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 조선을 세계 으뜸 나라로 세워나가자."

 

야린스키가 최봉준에게 남긴 유훈 처세 10조

 

1,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2, 명확한 목표를 세워라

3,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 해낼 수 있다.

4, 상대의 입장에서 행동하라.

5, 자기계발에 힘써라

6, 기회는 역경의 시기에 찾아온다.

7, 성공은 냉철한 자기 분석에서부터 시작된다.

8, 경쟁보다 협력을 하라.

9, 실패를 귀중한 교훈으로 삼아라.

10, 하루 하루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주엽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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