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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정신 Vs 영국의 신사도仁義禮智와 대의 위해 목숨도 버리는 추상같은 절개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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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02  11:4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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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품성,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우리는 죽더라도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여성부터 살리자”

1852년 2월27일 새벽 2시. 식인 상어떼가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북단의 한 해역에서 풍랑이 거칠게 휘몰아치는 가운데 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영국 해군 수송선 버른헤드로가 암초에 충돌,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배에는 군인 472명, 군인가족 162명이 타고 있었으나 60명 정원의 구명보트가 3척밖에 없어 180명만 구조되고 454명은 유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절망에 휩싸여 울부짖었다. 그러나 해군 장병들은 함장 시드니 대령의 진두지휘 아래 침착하게 가족들을 3척의 구명보트에 옮겨 태웠다. 해군 장병들은 18명이 더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도 타지 않았다. 가족들을 태운 구명보트가 시야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떠날 때까지 함장 이하 472명 전 장병은 차려 자세로 구명보트를 향해 거수경례한 채 가라앉는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죽음이 임박해 오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영국 해군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동요됨이 없이 자신들보다 어린이 ‧ 노약자 ‧ 여성을 살려 내 최고의 명예인 ‘신사도’를 발휘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 사실은 1859년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에 소개돼 뒤늦게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와 같이 영국 해군이 보여 준, 최후의 순간까지 책임과 도의를 다하는 공동체 정신인 ‘신사도’는 그 이후에도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중 하나로 꼽히며 회자되고 있다.

반면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48분. 전남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감자기 왼쪽으로 기울면서 전복됐다. 이 배는 승객과 승무원 476명이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깅이었다. 이들 중에는 수학여행길에 오른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도 포함돼 있었다.

사망자는 모두 295명. 이들 중 단 원고 학생과 교사만도 261명에 달한다. 11월 11일 수색이 종료될 때까지 실종자 9명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세월호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대부분 수학여행 중이던 같은 학교 10대들이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배가 기울고 객실에 물이 차오르는데도 선원들은 계속해서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온 국민은 슬픔에 휩싸였으며 분노했다. 생존한 학생들은 당시 상황을 세월호가 기울면서 물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도 가만히 있으라는 선원들의 말을 들었다고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 학생은 물이 기울어진 객실 문까지 물이 차오르자 객실 문까지 떠올라간 학생들이 서로 밀어올리고 끌어올리며 탈출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세월호 선박직 15명은 오전 9시35분부터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세월호 기관실 선원 8명이 가장 먼저 탈출했다. 결국 선원들은 승객과 배를 버린 혐의로 기소돼 중형을 받았으며 선장은 살인혐의로 사형이 언도됐다.

당시 세월호는 더 많은 승객들과 수하물을 싣기 위해 불법적으로 증‧개축됐으며 안전성을 현저히 잃어 애초 운항해서는 안 될 배였던 것이다. 게다가 과적 상태였다. 사고 당시 세월호는 물살이 거친 맹골수도 운항 경력이 없는 3등 항해사와 조타 실력이 미숙한 조타수에게 맡겨져 결국 미숙한 운항으로 배가 왼쪽으로 기울었고 과적에 제대로 묶이지도 않은 화물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침몰한 것으로 검찰 수가결과 밝혀졌다.

선비정신과 홍익인간, 화랑도 정신 등 전통적인 가치 새롭게 조명

여론은 들끓었고 부패가 빚어낸 참사라는 점에서 온 국민들은 경악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안전망 강화와 더불어 도덕성과 양심회복에 대한 사회의 자정적인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부패하고 타락한 도덕성이 얼마나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지를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선비정신과 홍익인간, 화랑도 정신 등 전통적인 가치가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걸으면서 오로지 돈을 모으는데 치중하다보니 생명경시풍조가 팽배하고 인성은 황폐화된 것에 대한 경고음으로 들린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폐쇄성과 배타적인 이기주의, 정치권의 후진성이 국가를 좀먹어 나라의 근간인 뿌리까지 흔드는 지경에 도달해 국민들의 각성이 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기자는 선비정신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들고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재야에서 선비정신에 대해 연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당사자는 한사코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아직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밝힐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수차례 설득한 결과 취재원을 밝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비로소 취재에 응했다. M씨가 얘기한 조선의 선비상은 그동안 사회에서 통용되는 선비상과는 사뭇 달라 때로는 의아스럽기도 했다.

M씨는 조선의 영남학파가 활발히 활동했던 경상도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전했다. 그가 태어난 작은 마을의 동네 사람들 중 3분의 1정도가 한학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한학을 공부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농민들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는 그곳에서 60~70년대를 지냈다고 하면서 그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한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의 정신과 행동 등을 보면서 자랐다고 했다. 선비정신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기품’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해서 또 6.25를 거치는 동안 우수한 문화들이 황폐화되고 왜곡되면서 많은 부분이 사라져갔다. 지금이야 한류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 전통문화까지 각광을 받고 있지만 한때는 서양문화는 세련된 것으로 치부되고 우리나라 전통문화는 촌스러운 것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외면하고 터부시하기 시작해 자칫 우리 삶의 뿌리인 역사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지금은 한류로 인해 전통에서 우리 것을 찾자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해야 한다는 물결이 일고 있다.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마라를 구하려 했지만 이미 망해가는 조선을 구하는 일은 …

M씨는 자신이 살았던 70년대까지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데 대해 그의 조부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구한말을 보냈던 그의 조부는 학자이면서 지주였다. 19세기 조선은 당쟁으로 국론은 분열되어 외침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조정은 무능했고 관료들은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로 인해 전정 군정 등 삼정의 문란은 가속화되었고 민심위반으로 동학농민봉기마저 일어났다. 그럼에도 양반이라 할 수 있는 특권층은 이를 외면하고 부를 축적하는 데만 골몰해 결국 조선은 50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망해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조부는 선비로서 나라가 망해가는 현실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라를 구하려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망해가는 조선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경박스러운 서양의 문화가 조선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그의 조부는 이러한 서양의 문화가 결국 조선을 망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서당과 서원들을 돌아다니면서 전통문화를 수호하려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당시 신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운동이 있는 반면 유학자들 중에서는 서양문물을 반대하면서 전통문화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망해가고 밀려드는 서양의 문화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조부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로선 신학문이라고 해서 공부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식공부를 집안 자식들은 아무도 하지 않게 했던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로 인해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신식공부를 우리 아버지는 물론이고 큰 아버지, 일가친척들 중에서 그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지주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동네 사람들도 아무도 신식공부를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또 일본에 부역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고요.”

M씨는 할아버지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했지만 대신 정신을 물려주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동네 사람들 중에서 3분의 1정도가 한학을 했으며 그 외의 사람들도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동네 사람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신문물을 접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다행인지 몰라도 그 덕분에 조선의 선비상을 보면서 자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선비정신의 핵심은 학문정진과 덕성을 기르는 자기수양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선비정신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와 대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리는 추상같은 절개를 얘기한다”고 하면서 “하지만 너무 피상적인 개념만 아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선비정신의 핵심은 인격완성을 위해 끊임없는 학문정진과 덕성을 기르는 자기수양이라고 했다. 그는 사서삼경 중 대학에는 있는 한 구절을 들었다.

탕지반명왈구일신(湯之盤銘曰苟日新)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탕의 반명에 이르기를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면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

이 구절은 탕왕이 자신의 근신을 위해 세숫대야에 이 같은 글을 새겨놓고 좌우명으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말은 매일 몸을 씻는 것 같이 마음을 갈고 닦으라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선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비난을 할 때 비난한 사람을 탓하기 보다는 먼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자신의 내면을 향해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비들은 학문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면서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인식확장’을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현실에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살면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또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은 것은 없었는지 등을 살펴 스스로 치유해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으로 살고자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비들은 좋은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생각과 마음이 올바르기 때문에 우려난 선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선비하면 기품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M씨는 깡통과 잘 다듬어진 악기를 예로 들면서 설명해나갔다. 깡통은 주위를 찌푸리게 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반면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사람도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인격이 미성숙해 비뚤어진 사람은 빈 깡통처럼 사물을 왜곡시켜서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부정적인 사람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도둑은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은 잘 보이지 않고 도둑 같은 면이 과장되어 보이는 등 범죄자 눈에는 다른 사람들이 범죄자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비뚤어진 세계관 때문에 불평불만이 많아 ‘남탓’을 잘하면서 쉽게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증오의 감정에 휘둘린다고.

반면 인격이 성숙한 사람은 잘 다듬어진 악기처럼 세상을 긍정적이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 한다. 즉 다른 사람의 좋은 점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의 인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얘기와도 일치한다.

선비는 자녀교육도 남달랐다

군림하는 가부장이 아니라 따뜻한 아버지상

M씨는 자신이 어릴 때 봐왔던 한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들려줬다. 유교하면 가부장제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가 봤던 가부장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보통 가부장제라 하면 아버지가 가족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가족에게 군림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가족을 보살피는 따뜻한 아버지라고 했다.

선비는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것을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않아 일어나는 수행부족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가족이든 이웃이든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경박한 언행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말이 있듯이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했다.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은 사사건건 간섭하고 호통만 치는 사람이기보다는 자유롭게 뛰어놀게 하면서도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었던 것 같아요. 때로는 미숙한 행동을 해도 기다려 주기도 하고 조금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관대함으로 덮어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바르지 못한 행동은,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았어요. 그런 날은 종아리 맞는 날이기도 했죠. 하지만 자녀들을 함부로 때리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면박 주는 일을 잘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감과 자긍심을 심어주려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선비는 나눔이 생활화된 사람’도 말했다. 선비들은 이웃이나 사회가 행복해야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 죽 그릇이 이웃집 담을 넘나들었으며 행여 집안에 좋은 음식이라도 하는 날은 동네잔치를 벌이듯이 나누었다고 했다. 특히 이전에는 놀이문화가 발달했는데 선비들이 정적인 사람 같지만 놀 때는 흥겹게 놀 줄도 아는 역동성도 지녔다고 했다.

내 몸같이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고 존중할 줄 알았던 선비들. 그들의 정신을 21세기인 지금 이 시대가 부르고 있다.

   
 
다른 사람이 무례하게 대하거나 과도한 요구는 단호히 거절하는 영국인

영국에는 갑을관계가 없다…서로 보완하고 돕는 상부상조라는 인식팽배

기사도 정신은 로마 제국이 기울 무렵인 5세기 북유럽 국가에서 탄생했다. 기사도라는 말은 소년이나 급한 용무를 띤 사자를 의미하던 기사(knight)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된 젊은 남자를 특별히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특권은 가문이 좋고 부유한 남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무기를 지닌 수 없었다.

중세의 기사들은 게르만 전사들의 무분별한 호전성을 순화시킬 필요성을 느껴 명예롭지 못한 기습공격이나 약자 ‧ 패자에 대한 학대와 살해 등은 금지됐다. 이 때문에 기사도란 영웅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품성으로 무용 ‧ 성실 ‧ 명예 ‧ 예의 등의 덕목이 있었다. 윗사람에게는 용기‧ 정의 ‧ 겸손 ‧ 충성으로, 동료에게는 예의로 약자에게는 연민으로 대했다.

기사 제도가 중세와 더불어 몰락하자 기사도를 대신해 존경할 만한 남성의 행동 규범으로 영국의 신사도가 나타났다. 명예의 존중과 관용, 봉사, 남과 함부로 싸우지 않는,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경우에도 일정한 룰을 지키는 것(소위 페어플레이 정신), 부상당한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다치게 하지 않는 것 등이 신사도의 핵심 내용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정중한 태도와 노인이나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위로도 기사도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영국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에 손상 받는 일을 싫어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과한 요구를 하면 단호히 거절한다. 영국인은 자식에게 매를 들기는 커녕 험한 말도 잘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국인 80%가 넘는 사람들이 ‘한 번도 맞아 보지 않고 때려 보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특히 영국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성과 살아가는 방식을 돈 몇 푼에 바꾸지 않겠다는 철학이 있다. 자신의 삶을 손상해가면서까지 금전적인 소득을 더 늘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돈이 더 많다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2001년 영국 BBC2에서 방영된 ‘오피스’라는 드라마에서 영국내의 직장생활을 생생히 방영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에서 지점장 데이비드 브랜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지점장과 직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갑을 관계가 아니다. 브랜트는 상관으로서 독단이나 횡포는커녕 권한도 권력도 위엄도 없다.

단지 직원들을 통솔해 지점 일을 잘 처리해 나가야 하는 책임이 있다. 보통의 영국인 평직원들은 승진이나 급여 인상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노력한다고 회사 내에서 자신의 위치가 크게 변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냥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해서 하루 종일 맡은 바 임무만 열심히 하다가 퇴근 시간 되면 칼같이 뒤도 안 돌아보고 퇴근한다.

그래도 전 직원 월급이 오를 때면 자동으로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신에 주어진 일과 월급에 만족해서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중간관리층은 경영진의 눈치도 봐야하고 실적도 올려야 하는데 직원들은 잘 따라주지 않으니 죽을 맛이다.

그래서 브랜트 지점장은 괜히 직원들은 듣지도 않는 잡담을 하면서 환심을 하서 직원들의 근무의욕을 높여보려 갖은 애를 쓴다. 직원들이 하지도 않는 회사에 대한 불만을 도맡아 해서 인심을 얻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직원들은 지점장을 골탕 먹인다.

   
 
이러한 관계는 영국 전반에 깔려 있다. 소유주와 종업원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침에 사장이 출근하는데 인사를 잘하는가가 직원 평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업무 성과에 따라 평가받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주종관계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보다 더 빨리, 남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싶어 하는 성공의 욕망보다 굴욕적인 갑을의 주종관계를 싫어한다. 사장과 직원들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나 갑을 관계라기보다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돕는 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봉건시대에 주종관계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왕이 귀족에게, 영주가 소작농에게 반드시 절대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인 봉건영주는 왕이 자신에게 준 봉토를 소작인이나 농노들을 이용해 경작해서 소출이 나와야 왕ㅇ게 세금도 바치고 자신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왜적이 침입하면 귀족들이 농군을 몰고 와서 자신을 지켜주어야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 결국 왕은 귀족으로부터 충성서약을 받고 봉토와 작위를 내려주고, 귀족은 충성과 세금과 종군의 의무를 반대로 바치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상호보완의 관계였다.

마찬가지로 농노들이나 자유민으로 구성된 소작농들도 봉건영주가 자신에게 나누어 준 토지를 경작해서 소작료를 바치는 대신 영주는 자신들을 도적떼나 이웃 영주들로부터 보호해 줄 울타리를 제공받는 호혜 관계였다. 이는 왕과 귀족, 귀족과 소작농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흑사병이 돌아 노동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든 14세기 이후부터는 농부들은 계약농으로 많이 바뀌어 농부들의 입김이 더 세졌지만 봉건사회의 주종관계는 엄격한 갑을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 관계였다.

특히 봉건사회에서 영주가 자신의 농노나 소작인들에게 너무 인색하게 굴거나 악독하게 하면 평이 나빠져 귀족으로서 품위를 잃은 것으로 여겨져 많은 문제가 생겼다. 귀족들은 이런 평에 상당히 민감했다. 흉년이 들어 소출이 줄어들어 소작료는 커녕 농부들이 겨울을 날 식량마저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영주는 자신의 곳간을 열어 구휼을 했다. 역병이 돌 경우 소작료를 감해 주기도 했다. 이런 ‘온정주의’가 중세에 영국을 지탱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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