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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으로 조선 살린 潛谷김육-(1)극단적인 고통 이기고, 백성 위한 정치 펼쳐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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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31  14: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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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물제인(愛物濟人)은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뜻이다.

조선 최고의 경제 전문가이자 대동법 실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잠곡(簪谷) 김육(金堉 1580~1658)은 이 말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리고 그는 오직 백성만을 위한 정치를 꿈꿨었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선에서 손꼽히는 개혁가다.

남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극단적인 고통과 고생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을 갈고 닦아 마침내 크나큰 성취를 이뤄 우리나라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쓴 글에서 “내가 10여세 되던 때 아버지께 소학을 받아서 읽다가 ‘일명(一命)의 관원이 참으로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고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한 부분에 이르러서 척연히 마음속에 감동되는 바가 있었다. 반드시 일명의 관원만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마땅히 모두 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다만 아무리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반드시 일명 아상의 관직에 있는 자라야 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일명의 관원’은 쉽게 말하면 조선 시대 종 9품 벼슬로 오늘날에 비하면 9급 공무원과 비슷하다. 김육이 평생 동안 반대파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혜택을 주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이 ‘애물제인’이란 말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치투쟁, 그리고 겪은 가문의 수난

잠곡의 고조부 김식은 기묘사화 당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사림의 공론을 주도한 인물이다. 하지만 김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갔다.

잠곡의 아버지 김흥우가 1585년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면서 살림이 나아지는 듯 했지만 김육이 11살 되던 1590년에 할아버지 김비가 병으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르게 되면서 다시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2년 뒤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그 와중에 1594년 아버지 김흥우가 31살의 나이로 병사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리고 1598년 8월에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1600년 1월에는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어머니의 상을 치를 때 인부를 살 돈이 없어서 자신이 직접 무덤을 파고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을 휩쓴 최대의 전란과 연이은 초상을 김육은 한꺼번에 겪은 것이다.

   
 
잠곡이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살다가 남양주의 평구에 자리 잡고 살 때에는 먹고살 길이 없어 산에서 숯을 구원 동대문까지 지고 와서 팔아먹고 살았다. 평구에서 동대문까지는 대략 30, 40리 정도 됐다. 그런데도 동대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김육이라고 할 정도로 부지런했다.

이렇게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학문을 익혔다. 그리고 1605년 25세 때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으로 공부했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른바 5현을 문묘에 모시는 5현 종사를 건의했다.

1611년 정인홍 등이 이황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부황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퇴교 당했다. 이후 서울을 떠나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서 살았다. 그의 호인 잠곡은 여기서 따왔다.

당시 그는 중년의 나이에 집 한 칸이 없어 토굴을 파 움집을 만들고는 그 속에서 살았다. 잠곡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자신까지 합해 모두 여덟 명의 식구가 토골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미루어서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의금부 도사가 됐다. 이때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를 모시고 피난했다가 돌아와 음성 현감으로 부임했다. 이때 잠곡은 상소문을 올려 공납문제를 거론했다.

음성현이 바쳐야 했던 공납이 너무 무거워 백성들에게 적잖은 부담이 되므로 음성현과 이웃하는 청안현의 고을과 합치든지 아니면 충주의 고을 몇 개를 음성현과 합치든지 하여 고을의 크기를 조정하고 부세 부담의 불균등을 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 그가 대동법에 올인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636년 명나라에 파견될 성절사(聖節使)로서 연경에 갔으며, 1637년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의 발발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귀국한 후 1638년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된다. 이에 잠곡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동법을 추진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김육 이전에도 권반(權盼)이 이미 충청도 감사로 재직하면서 대동법에 관련된 사안을 작성해 놓았고 충청도 관찰사 이경여(李敬輿)가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앞서간 선배들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마련한 토대를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이때도 반대파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즉위하니 그가 효종이다. 당시 잠곡의 나이는 70세였다. 그는 나이가 들어 관직에서 물러날 생각이었지만 효종을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이때 잠곡은 대동법을 시행하려 효종에게 상소를 올린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감히 별폭(別幅)에 써서 올립니다.” <효종실록>

이 같은 상소의 요지는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조정 내에서는 대동법 실시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다수였지만 잠곡은 대동법에 대한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효종 2년(1651년), 그가 영의정에 임명되자 결국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장 실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좌의정으로 물러났다가 효종 5년(1654년), 다시 영의정이 되자 대동법을 호남지방에 확대하려 했지만 그 시행을 앞두고 효종 9년(1658년) 9월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대동법은 숙종 34년(1708년)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전국적인 세법이 됐다. 꼭 100년 만에 전국적인 세법이 된 것이다.

백성들의 삼환(三患) 없애는 대동법

삼환이란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추위에 떠는 자가 입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피로한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백성들의 커다란 근심거리였다.

조선시대에는 전세(田稅)와 공(貢), 역(役)이 당시 백성의 주요 의무였다. 땅 마지기 숫자대로 세를 물리는 것이 전세다. 공은 특산물·진상품 등과 같이 실제 물건 즉 현물로 ‘바치는’ 또 하나의 세목(稅目)이었다. 이를 운반하는 데 드는 품<역(役)>도 함께 부담했다. 군대에 가거나 성(城)을 짓는 것과 같은 공공의 공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역이다.

공은 가구(家口)를 기준으로 부과했다. 처음에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 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이지만 국가 수입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주요 세원(稅源)으로 자리잡았다. 공물의 종류와 수량은 국가에서 소요되는 것을 기준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천재(天災)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 양이 감면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토산물까지 부과하여 백성들은 현물을 외지에 가서 사오는 부담까지 지게 됐다. 이러한 제도의 허점을 틈타서 상인 · 관원이 백성 대신 공물을 대납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利)를 붙여 수탈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군현 · 마을 안에서 대토지를 가진 양반 지주와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소작농이 같은 액수를 부담하거나 가난한 소작농들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전쟁 후 조선 정부가 재정 파탄을 수습하기 위해 재정수입을 급격히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공물 부담이 늘어나면서 그 징수의 기반마저 붕괴될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러한 공납폐단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면 되는 데, 이것이 바로 대동법이다.

즉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세금을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소작농은 면제되는 것이다. 백성의 공물납부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국가재정 수입을 확대하고 동시에 공물부담에서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지역 특산물 대신에 쌀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로 임진왜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민생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동시에 방납 업자와 지방 관리 등의 중간 수탈을 배제해 재정 충실을 기할 수도 있는 제도였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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