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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지상 조선국왕, 사생활은 없다후궁이나 궁녀 희롱하는 모습…드라마일 뿐
노진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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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14  11: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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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영중인 SBS 드라마 '비밀의 문'의 한 장면
국왕은 만인지상에 있는 지존자요, 한 국가의 삼권을 모두 행사하는 절대 권력자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시대 국왕의 하루는 힘든 시간들이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 왕은 국가질서의 중심이었다.

조선 국왕의 일상이 후궁이나 궁녀들과 희롱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드라마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드문 경우다. 조선시대에는 태조부터 순종까지 총 27명의 왕이 있었다. 이들 왕들의 업적과 사건 등 표면적인 모습은 교과서나 사극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어떠했는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국왕의 하루 일과는 아침, 낮, 저녁, 밤의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국왕이 처리하는 업무는 만 가지나 될 정도로 많다 해서 ‘만기(萬機)라고도 불렀다.

조선 국왕의 하루는 파루(罷漏)와 함께 시작한다. 파루란 도성 내의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종각(鐘閣)의 종을 33번 치는 것인데, 이때가 새벽 4시쯤인 오경삼점(五更三點)이다. 33번 치는 것은 제석천(帝釋天)을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하루 동안 나라가 편안하기를 빈 것이었다. 조선이 비록 유교 국가지만, 나라만 편안하다면야 공자면 어떻고 석가면 어떠냐는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밤 10시쯤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을 치는 것을 인정(人定)이라고 하는데, 28번 치는 것은 28수(宿)의 별에 밤의 안녕을 비는 의미였다.

국왕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간단한 죽 등으로 요기를 한 후 대비전에 문안인사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먼저 대비와 대왕대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직접 인사를 올릴 수 없을 때는 내시를 대신 보낸다. 군주는 나라 안 모든 사람의 스승이자 모범이어야 했으므로 효(孝)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다. ‘효자 집안에서 충신이 난다’는 말처럼 부모에게 효도를 권장하는 것은 나라에 충성을 권장하는 길이기도 했다.

대비전 문안 후 아침 식사를 마치면 조강(朝講)을 해야 했다. 경연(經筵)의 일종인 조강은 학문에 밝은 유신(儒臣)들과 학문·시사를 논하는 자리로서 학술토론회 겸 정책토론회 자리였다. 이 경연이 끝나면 아침식사를 하고 조회를 시작하는데, 왕의 공식집무는 여기서 부터다.

조회는 문무백관이 모두 참여하는 정식조회(朝參)와 매일매일 시행하는 약식조회(常參)가 있다. 아침조회인 상참이 끝나면 승지를 비롯해 공무가 있는 신료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다. 이때에는 반드시 사관이 배석한다. 왕에게 보고하는 업무를 사관이 직접 듣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업무보고를 받고나면 이어서 아침조회에 참석하지 못한 각 행정부의 관료들을 만난다. 이때 관료는 하루 5명 이하로 제한했고 문신은 6품 이상, 무신은 4품 이상이어야 했다.

그리고 왕은 점심을 먹고 주강(晝講)에 참여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세종·성종·정조 등 경연에 열심이었던 임금들이 대부분 성공한 임금이란 점이다. 그만큼 성공한 국왕의 필수 조건이 지식경영이라는 방증이다.

성종은 대비와 공신들 덕분에 친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이 되었으므로, 부족한 자신의 정통성을 경연으로 메우려 했다. 성종 재위 1년(1470년) 6월5일의 일이다. 날이 매우 무덥자 원상(院相) 김질이 “때가 마침 혹독하게 더운데 하루에 세 번이나 경연에 나가는 것은 성체(聖體)가 피로할까 염려되니 주강은 정지하시고, 또 석강은 편복(便服·일상복)으로 하시라”고 제안했다. 성종은 “내가 촌음(寸陰)도 아까워하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하겠는가? 또 조신(朝臣)을 어찌 편복을 입고 접견하겠는가?”라고 거절했다. 이때 성종의 나이 겨우 만 열세 살이었다.

경연은 대략 1시간 정도 걸리지만 더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선 12대 임금 인종(仁宗·재위 1544~1545년)의 묘지문에는 “하루에 세 번 경연에 나아갔으며 또 야강이 있었는데, 비록 매서운 추위나 맹렬한 더위에도 종일토록 바로 앉아 배운 것을 익히고 또 익혔으며, 아침이 되면 또 한두 번 읽고 나가는 것을 일과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정조 같은 경우는 사강(射講)도 했는데, 사강이란 문무관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는 것이었다. 문약(文弱)을 극복하고 상무(尙武) 정신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세자 시절 혹독한 공부로 ‘준비된 임금’

 

이처럼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준비란 세자 시절부터 익히는 것이었다. 세자의 하루는 공부의 연속이었다. 최고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 하루 종일 공부해야 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거처를 함부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국왕과 왕비 등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미래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다. 책봉 직 후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한 뒤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로 구성된 세사시강원 관료들의 지도 아래 강의 방식은 크게 법강(法講)과 회강(會講)으로 구분했다. 정규 강의인 법강은 아침 공부인 조강(朝講), 낮 공부인 주강(晝講), 전겨 공부인 석강(夕講)으로 이어졌다.

이 외에도 말타기, 활쏘기 등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정조는 세자 시절의 일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춘궁(春宮·동궁)에 있을 적에 교유했던 빈료(賓僚·시강원 관료) 중에는 경학(經學)으로 이름난 선비가 많았다. 매번 선왕의 침수(寢睡·잠자리)를 여쭙고 수라상을 살피는 틈틈이 이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나서 토론했다. 또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차분히 궁리격물(窮理格物)의 학문을 공부했는데, 어떤 때는 종일토록 꿇어앉아 공부했다. 그 때문에 입고 있던 바지가 닳아 헐기까지 했는데 이 일이 지금까지 궁중에 전해져오고 있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바는 반드시 요순(堯舜)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홍재전서>, 163권 ‘일득록(日得錄)’)

왕도를 익히는 이유는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요순 같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로 노력해야 ‘준비된 임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아무에게나 ‘준비된 대통령’ 따위의 말들을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 조회 늦을까 봐 침실 근처에 닭 기르고 초인적 의지로 국정수행

 

정조 때의 문신 윤행임(尹行恁)이 ‘임금께서는 행여라도 조회에 늦으실까 봐/ 침실 동쪽에 장닭을 기르시네(宸心或恐朝儀晏 燕寢東頭養報鷄)’라는 춘첩(春帖)을 지어 올렸듯이 정조는 침실 근처에 횃대를 설치하고 닭을 길렀다. 조회에 늦을 것을 염려해서다. 정조는 이 시를 보고 “나는 촛불 아래에서 상소나 장계, 혹은 옛사람의 글을 읽다가 밤늦게 자리에 들어 날이 새는지를 모를 때가 있으므로 횃대를 설치해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니 그대 말이 사실이다.”(<홍재전서> 162권, ‘일득록(日得錄)’)라고 시인하면서도 “근래 시종신(侍從臣·측근 신하)들이 옛사람처럼 붓을 들어 규간(規諫·간쟁)하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아첨하는 뜻이 있으니 내 어찌 이를 좋아하겠는가”라고 훈계했다. 시종신이라면 쓴소리를 해야지 왜 아첨하는 뜻을 보이느냐는 말이었다. 정조는 쓴소리가 국정 운영에 좋은 약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초인적 의지로 국정을 수행하던 정조가 정작 강조한 것은 자기반성이었다.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편찬한 국왕의 일기가 <일성록(日省錄)>이다. 정조는 <일성록>을 편찬하는 이유에 대해 “증자(曾子)가 매일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했다는 교훈은 학자의 실천 공부에 가장 긴요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교훈을 가슴에 담아왔다”(‘일득록’)라고 말했다. 공자의 제자 증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은 “남을 위해서 일하는 데 정성을 다했는가? 벗들과 사귀는 데 신의를 다했는가? 배운 가르침을 실천했는가?(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더해 “밤에는 하루의 일을 점검하고, 한 달이 끝날 때면 한 달 동안 한 일을 점검하고, 한 해가 끝날 때면 한 해 동안 한 일을 점검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실천하니 정령(政令)과 일 처리 과정에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 편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마음속에 깨닫게 된다. 이 역시 날마다 반성하는 한 가지 방도다”(<홍재전서> 161권 ‘일득록’)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국왕의 일과가 모두 공개된다는 점이다. 국왕의 일상에는 늘 승지와 사관이 함께했다. 정조는 “옛날 임금들은 외조(外朝)에는 국사(國史)를 두고 내조(內朝)에는 여사(女史)를 두었고, 거동은 좌사(左史)가 쓰고 말은 우사(右史)가 썼는데, 임금은 숨기는 것이 없음을 보이고 모범과 감계를 밝히려는 이유에서였다”(<홍재전서> 182권, ‘군서표기(群書標記)’)라고 말했다. 국왕의 모든 행적은 공개되고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진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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