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작가라는 직업 때문에라도 늘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는 편이다. 꼭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메모를 해놔야 안심이 된다.

연초에 한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압축 목탄으로 심플하면서도 섬세한 드로잉 작업이 주를 이루는 회화 전시였다.

이른바, ‘사물의 초상화’라고 명명해도 될 만큼 사물의 표정과 느낌을 특색 있게, 담담히 담고 있는 작품들. 작가는 사물(事物)과 밀착하여 조응(照應) 하는 순간을 섬세하게 되살려내고 있었다.

글을 쓰는 작가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메모해놨다가, 키워드를 살려 모티브에 살을 붙이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듯, 화가는 순간순간 느꼈던 사물의 느낌과 표정을 작가 자신의 필치로 펼쳐내 보이고 있다.

작가는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일까? 학아재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物, 물끄러미 사물의 추억> 정용남展에서 작가와의 이야기를 나눠봤다.

#1. ‘일상’의 기록

작가는 ‘일기’를 쓰듯 그날그날의 일상 속 사물을 담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 많은 사물 속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욕실에 가서 양치질을 한다. 매일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익숙한 칫솔의 감촉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그리움의 결로 다가온다.

식탁에 놓여있는 바나나는 저승꽃이 핀 노인의 피부처럼 검은 꽃이 피어나고 있지만 잘 익은 속내는 달콤함과 영양분을 제공한다. 나도 당신 옆에서 잘 살아가고 있었노라 말하듯 검게 변해가는 바나나에서 삶의 지혜와 생의 목소리를 듣는다.

커피를 내려 먹는다. 원두를 갈면서 커피의 검고, 진하고, 쓰고, 달콤한 맛과 향, 우려 나온 커피를 음미한다. 따스한 찻잔의 온기는 잔잔한 평화를 가져다준다.

매일 밥상에 오르는 유달리 예쁜 그릇. 자신을 비워 밥을 담아내는 그릇이 고맙고, 그릇을 선물해준 친구 생각을 한다.

집을 나와 산책을 즐긴다. 죽어있는 마른 풀. 그 정갈한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다. 봄이 되어 새싹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마른 풀을 닮고 싶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열면 강아지가 가장 먼저 반기며 꼬리를 흔든다. 혼자 있는 듯 무심하다가도 매일 저녁 목욕은 꼭 시켜준다. 밤이 깊어지면 지인이 준 검둥 강아지는 전 주인이 남기고 간 해진 소파 위에서 잠이 든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 백열등을 끈다. 필라멘트의 잔불이 어슴푸레 편안하다.

#2. ‘추억’의 기록

빵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빵 공장을 하셨던 아버지는 새벽 어스름 속에서 구수한 빵 냄새를 풍기며 밀가루 반죽을 하셨다. 언제나 아버지 어깨 위에 무겁게 얹혀 있었던 하얀 밀가루. 그렇게 아버지는 말랑거리며 부푼 밀가루 반죽 덩어리로 기억된다.

노란 백열등을 보면 새벽부터 빵 반죽을 준비하시던 부모님의 분주한 하루가 생각난다. 그 불이 꺼지고 나서야 두 분의 휴식이 찾아왔었다. 나도 불을 끄면 부모님의 고단했던 하루와 나의 하루가 오버랩 되면서 감사한 휴식을 맞는다.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 있다. 돌이켜보니 좋은 일이 생길 때면 스스로 자축하듯 와인을 마셨다. 그림이 잘 그려질 때, 뭔가 스스로 축하할 일이 생길 때, 나는 축제처럼, 의식을 치루 듯 와인을 딴다. 와인과 함께 나의 인생도 찬란하게 빛나고, 그렇게 와인에 취하고 싶다.

집 앞 편의점 옆에 모과나무가 있다. 삭막한 도심 한가운데서도 모과는 알맞게 익어간다. 가을이 되자, 모과는 더 예쁜 노랑으로 변했고, 반점도 생겼다. 그냥 봐도 예쁘지만, 잔잔한 향이 달콤하다. 나중에는 차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향기롭게 익어가고, 과육까지도 맛있는 차로 변한 모과를 보며 모과의 일생을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익어가고 있는가?

#3. ‘욕망’의 기록

숟가락과 밥그릇. 존재 이유가 분명한 것들. 밥을 담고, 밥을 떠먹고, 나의 욕망을, 안위를 채워주는 것들.

소파. 술 마신 날 들어와서 아무렇게나 드러눕고, 강아지와 부둥켜안고 놀고, 나를 위해 휴식을 제공하고, 안아주고,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늘 고맙고 준비돼 있고, 기다려주는 존재.

스케치북. 전철을 타고 가다가, 만남 속에서, 산책길에 마주하는 그리고 싶은 것들을 담는 드로잉 노트. 그리고 책과 펜. 내가 알고 싶고 메모하고 싶은,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도구. 오디오.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계. 그 밖의 작업실에 있는 모든 도구들. 나의 작품 활동을 위해 나를 도와주는 사물들.

#에필로그

이처럼 ‘사물의 기록’은 단순히 사물에 대한 인상뿐 아니라,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무심한 듯 존재하지만, 알고 보면 끊임없이 나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나를 둘러싼 사물들. 그 소유가 무관심이 아닌, 생성에서의 소멸까지 상호 유기적으로 관계 맺기를 하고, 자연스럽게 작용하고 대응해 가는 과정을 작가는 ‘사물의 기록’에 담았다.

관람자도 작품을 통해서는 물론, 자신을 둘러싼 사물 속에서 ‘일상’을, ‘추억’을, ‘욕망’을 ‘나’를 반추해 볼 수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많은 물건들로 넘쳐나는 물신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사물들에, 아니, 아예 나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채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꽉 채워지면 더 이상 담을 게 없다고들 한다. 작가는 사물의 기록 속에 쉼과 여백의 공간도 함께 담아놓았다. 관람자는 어쩌면 그 간극을 느끼고 감응하는 지도 모른다.

성인군자처럼 ‘무소유’의 철학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평소 나를 둘러싼 사물 속에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와 ‘참다운 나’를 반추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物, 물끄러미 사물의 추억>정용남展은 2016년 2.28일까지 학아재 미술관에서 계속됩니다.

김영주 방송작가  webmaster@k-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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