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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선 사진가] 사진에 대한 추억 여전히 새록새록아역배우 출신 꼬마신랑 김정훈과 인기 MC 허참이 단골손님
박관식 기자  |  news@kpc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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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07  15: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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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그래도 잘나가는 괜찮은 사진관이 아니었을까요? 1970년 홍은동 네거리에 완성된 유진상가 근처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으니까요. 초기 유진상가 입주자들은 고위 공무원과 법조인 등이 다수 살았으니까요. 그 당시 아역배우로서 ‘꼬마신랑’으로 유명했던 배우 김정훈과 인기 MC 허참 씨가 우리 성도사진관 단골이었지요.”

굳이 붙인다면 사진작가라기보다는 사진가로 불리기를 바라는 신영선(70) 대표의 추억담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반 김정훈과 허참은 제법 인기 있는 스타 반열의 연예인이었다.

최근 우연찮게 ‘꼬마신랑’이라는 애칭을 지닌 배우 김정훈이 bob스타컴퍼니와 생애 첫 전속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힌 바 있다. 4살의 어린 나이로 영화계 데뷔해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꼬마 신랑>, <고교 얄개> 등 히트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배우 김정훈이 20여 년 만의 컴백을 알렸다.

허참은 현재 남양주 화도읍에서 ‘허참과 함께하는 텃밭식당’을 운영하면서 전원생활을 누리고 있다.

유진상가, 성도사진관 운영

신영선 대표가 1970년 후반 개업한 성도사진관과 가까운 유진상가는 서울에 몇 안 남은 상가아파트다. 1층 전체와 2층 일부가 상가로 쓰이고 나머지는 주거용인 2000년대 주상복합의 아비뻘이다.

신영선 대표는 “1970년대만 해도 청와대, 정부청사, 법원, 검찰청 등이 가까워 고위 공무원과 법조인이 많이 살았다. 시간이 흘러 인근 시장과 상가에서 장사로 돈을 모은 사람들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초기 입주자들의 세도가 만만찮았다고 기억했다.

이어 신 대표는 “옆의 인왕시장이 농산물을 취급하는 서울 서북권의 거점 시장으로 김장철이면 새벽부터 소음이 심했다”며 “1972년 쯤 여기 살던 청와대 경호처장이 새벽에 경찰서장과 구청장을 불러 야단칠 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군 고위급도 많이 살아 장성들 별을 모으면 10여개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신영선 대표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사진 일을 시작한 관계로 22살에 이미 좋은 자리를 선점한 셈이다. 사실 그 당시 우연히 유진상가 근처의 사진관을 인수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수완이 있었던 게다.

이에 대해 신영선 대표는 “우리 집안이 한학자 집안인 관계로 어린 시절 한자를 의무적으로 배우며 자랐는데 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지금도 틈틈이 명심보감을 읽고 쓰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포근해진다”며 “장애자 아들을 위해 일찌감치 상급학교보다 취업전선으로 내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깨달았다”고 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신영선 대표를 처음 만난 순간 충격적인 당신의 장애 사실에 기자의 말문이 닫혔다. 사고공화국의 현대를 살아가는 관계로 장애에 대한 재난 대비가 절실한 이즈음 신영선 대표의 오른손 장애는 숨을 멎게 했다.

왜 하필 사진사에게 가장 중요한 오른손의 손가락을 깡그리 뭉개 버렸을까?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그 많고 많은 장애 중에서도 굳이 카메라의 주요 부분을 다루는 부위를…

어머니, 황소 한 마리 값 카메라 선뜻 내줘

   
▲ 기나긴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다.

기자가 인사하기 위해 오른손을 내미는 순간 눈길을 의심했지만 신영선 대표는 전혀 미동도 없이 담담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60년 넘게 해온 연례행사이기에 구태여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었다.

장애 증상에 대한 무언의 질문에 신 대표는 “1살 때 화롯불에 손을 넣었다가 다 녹아 버렸다. 당시 후송해서 치료했다면 이 정도로 녹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며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화롯불이라면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뜨거웠을 텐데 어떻게 이럴 수 있었는지…” 혀를 끌끌 찼다.

출산율이 상당히 높았던 그 당시 우리네 가족은 눈뜨기 무섭게 들판으로 나가 농사짓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속하지 않은 화롯불에 갓난아기의 오른손을 지져 영원한 저주로 남고 말았다.

두고두고 한이 남을 만큼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더욱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지독하리만치 잔인했던 그 시절이고 보면 어머니로서는 초강수를 쓸 수밖에 없었을게다.

결국 어머니는 작은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15세 때 황소 한 마리 값의 카메라를 사줘 고향인 경북 봉화읍 봉성면 사진관에 기사로 취직시켰다. 신영선 대표의 기구한 사진 인생은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작됐다.

처음부터 사진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아기를 보고, 청소해 주고, 밥도 하는 등 기본적인 일부터 해냈다.

가장 중요한 오른손 손가락이 없어도 카메라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고 정밀한 연필 작업도 빨리 연마했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런 불리한 조건은 어린 신영선을 더욱 강하게 키웠다. 장애인을 대하는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최고의 사진사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작품이 사라진 사진작가(?)

   
▲ 삶의 흔적이 남은 다양한 작품 사진.

반드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남겨야만 사진작가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일까? 반대로 사진 작품을 남기지 못한 이는 사진작가가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의 필요충분조건이 합당한지 의문이다. 더구나 그 옛날의 사진 작품은 현재의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였기에 보관하는 데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진관을 운영했기에 손님들에게 다양한 포즈의 얼굴 사진을 수없이 납품(?)하는 것이 업무였기에 당연한 귀결이다. 물론 보다 더 예쁜 얼굴을 위해 연필로 덧칠을 그리는 세밀 작업도 수행했다.

신영선 대표는 사진사인 동시에 이른바 연필 자국 기술자였다. 원판에 니스를 문질러 닦은 후 연필로 그려 얼굴을 화사하게 보정해 줬다. 기념일 숫자는 칼로 긁어 정교한 글씨를 써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더 이상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물음이 있었다. 그 불편한 오른손으로 어떻게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연필로 그리고 글씨를 썼는지…….

자동 생성되는 연륜 포즈

기자도 오랜 시간 사진을 직접 찍으며 취재를 다닌 관계로 사진기에 대해 자신감은 어느 정도 있다. 그래서 이론적인 실무보다는 경험만큼 훌륭한 선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 탓일까. 신영선 대표와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찍는 데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 전해졌다. 무엇 때문일까. 아하,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오래된 경륜에서 빚어진 자연스런 포즈를 너무나 쉽고 편안하게 해준 것이다. 사진사가 요구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지 않고 다양한 포즈를 미리 만들어 주는 프로만이 누리는 구도의 미학이다.

이런 것을 두고 먹물들은 전문용어를 써가면서 온갖 미화를 한다. 그러나 기자는 신 대표의 노련한 그런 모습에서 찐한 눈물의 기억을 떠올리고 이내 쓸쓸해진다.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신영선 대표는 이 대목에서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머니 생각이 문득 떠올라 눈물이 났다. 오래 전 시골 고향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납골당을 만들어놓았더니 오히려 오래 사시다가 16년 만에 돌아가셨다.”며 “갓난아기 때 잘못 지킨 업보로 마음 고생하셨을 어머니 생각하면 지금도 한쪽 가슴이 아리다. 부모라는 게 참….”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신영선 대표는 소위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진 전문이론은 배우지 못했지만 그런 기술을 스스로 습득하고 연구해 터득했다. 물론 모르는 것은 선배나 지인들에게 물어 빨리 보완했던 것은 기본이다.

평범한 전구 불빛을 궤적으로 한 카메라의 흔들림과 저속 셔터에 의한 이미지도 계속 반복해야 한다. 효과를 높이기 위한 노출 측정의 어려움으로 촬영 전에 충분히 노출 시간을 테스트해야 한다.

원경과 근경의 차이를 명백히 구분하고, 물체의 질감 묘사를 위해 측광이나 사광을 이용하고, 심도 깊고 입체감이 뚜렷한 사진을 만들기 위한 조리개 조작 방법 등 수없이 많다.

신영선 대표는 “한때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앨범 제작까지 관여했다. 단골 고객과 손님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영역이 확대되면서 돈도 제법 벌 기회가 있었다”며 “그러나 체질상 약지 못하고 비사교적인 탓에 사진으로 성공한 인생은 못되었다. 그래도 한번 살아온 내 인생에서 좀처럼 하기 힘든 과도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겼다는 데 자존감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른바 그가 수없이 남긴 대한민국 사람들의 인물 사진이 각자의 집안과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굳이 요상한 포즈의 얼굴로 작품성을 따지는 상투적인 그런 사진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비록 소형의 스마트폰 사진 성능이 훨씬 고급적이긴 해도 여전히 둔탁한 촌스러운 사진을 찍는 꿈을 꾼다. 한 달에 한 번씩 떠나는 산악회장으로서 동료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손길이 아직도 건강하다는 증표이기에 행복하다고….

박관식 기자  news@kpc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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