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칼럼
[데스크 칼럼] 6월을 맞아 정리해보는 학생운동 변천사역사에서 살펴보는 어제와 오늘
정재형 기자  |  news@kpci.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5.29  10:47:2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6월이 되면 무조건 6.25전쟁이 떠올랐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반공 포스터를 만들었고, 우수작품들은 거리 곳곳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다 보니 이제 6월이 되면 6.25보다는 6월 항쟁이 더 떠오른다. 그것은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국민 모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아픔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 청년 대학생이 주도했던 당시 학생운동의 변천사를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당시 우리 사회의 단편을 간략히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군부독재정권에서 소위 혁명운동가들, 특히 청년지식인들은 그들을 구원할 이념을 찾기에 몰두했다. 이전 단순 학생운동에서 벗어나 사상을 주입시킴으로써 학생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그중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소위 민중민주주의(PD) 노선을 받아들였다. 이 PD계열의 모델은 러시아 혁명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믿으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러시아 혁명사, 레닌의 전략·전술을 연구했다.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지도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규정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낡은 부르주아 사상으로, 북한을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전체주의 독재국가로 간주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세력은 민주화 이후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나 이념적으로는 진보정파가 되었다.

또 하나의 갈림은 1980년 광주 학살의 배후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을 중시한 청년지식인들이 민족해방(NL) 노선으로 결집했다. 이 NL계열의 모든 사회악의 근원은 미제국주의였다. 분단도, 독재도, 자본주의적 악덕도, 모두 미제국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통일도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러시아 방식의 혁명은 대한민국 실정에 맞지 않았다.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중산층과 소자산계급을 포함해 각계각층 모든 민중을 반미의 기치 아래 결속함으로써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혁명에 의한 나라 전복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북한은 민족자주를 최고의 가치로 표방하고 있는 만큼 북한 정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단파 라디오로 북한 대남선전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이 송출한 ‘구국의 소리’ 방송을 녹취해 학습자료로 삼았다. 한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규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이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모든 인사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민주화 운동 인사를 탄압할 때 주로 쓰던 ‘주사파’라는 딱지는 이들 NL계열 때문에 생긴 오해(?)였던 것이다. 사실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들의 영향력은 소소한 편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강력한 힘을 얻기에 이른다.

1985년 전두환 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2월 12일에 치른 제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국민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민정당이 2.12 총선에서 사실상 패배하면서 전두환 정권은 정국 주도권을 상실했다. 신민당과 재야, 학생운동 세력은 더욱 거세게 정부를 공격했다. 

이때 당시 학생운동의 주도권은 PD계열에서 NL계열로 넘어갔다. 학생운동은 학습 서클과 비밀결사 수준을 넘어섰고 자치조직인 총학생회 그 자체가 거리시위를 수행하는 전투조직으로 변화해 전국적 연대를 형성했다. NL계열의 조직에는 구국학생연맹, 애국학생회, 구국학생동맹과 같은, 민족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 붙었다. 반미와 민주화를 결합한 이름을 짓는 게 유행이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가 김영환이 쓴 ‘강철서신’ 시리즈가 지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와 같은 자극적 제목을 단 팸플릿에서, 그는 김일성의 관점으로 박헌영을 비판하면서 주체사상의 ‘수령관’과 ‘품성론’을 전파했다. 

강철이라는 필명을 널리 떨쳤던 김영환은 반제청년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남파간첩과 접촉한 그는 1991년 강화도 해안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으며 1992년 하영옥 등과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결성하고 지역조직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본 북한의 실상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번민하다가 1997년 초 민혁당을 스스로 해산했다. 1998년 말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해군의 함포를 맞아 침몰한 북한 반잠수정에서 관련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민혁당은 그저 몇몇 청년지식인이 벌인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영환은 ‘북한해방운동가’로 전향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중심으로 결속해 있던 재야 진보세력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거쳐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운동단체 14개와 13개 지역운동단체가 결합한 전국연합은 1997년 사실상 해체되었다. 2008년 공식 해산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로 전환되었다. 경기동부, 울산, 인천 등 NL계열 지역운동단체들은 전국연합이 사실상 해체된 1997년 이후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결합해 당권을 장악했다.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통합진보당으로 결속했다가 2013년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혐의 구속을 계기로 결국 해산한다.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등은 일대 변화를 맞았다. 그중에 지도자급들은 이미 정치권에 입문하여 현재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나름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보수성향 정당으로, 진보성향 정당으로 각자 노선에 맞게 이들은 자기만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정부 탄압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이 많아지는 6월이다. 

   
▲ 정재형 편집장.

정재형 기자  news@kpci.co.kr

<저작권자 © 오늘의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재형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우리나라 마지막 단풍놀이 완도군 청산도, 20일 절정
2
교육위원회, 21대 국회 첫 청원심사소위 개최
3
[등산트래킹] 수우도 은박산 비경(秘景) 산행
4
순천 기적의도서관, 개관 17주년 기념행사 마련
5
김영춘 국회사무총장, 국회부산도서관 건설 현장 방문
6
미국 화이자 “코로나 백신 효능 90% 이상 개발”
7
[국내여행] 경북 청송 송소고택 가보셨나요?
8
"앞으로 2년 동안 임대주택 11만 4000가구 공급"
9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 손해액 산정방식 개선, 유턴기업 지원확대 등 법안 처리
10
노인·장애인·국가유공자 지하철 무임승차 비용, 국가가 부담 한다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513) 서울특별시 금천구 벚꽃로234 | 대표전화 : 02)702-0111 | 팩스 : 070-4275-1429
잡지사업등록번호 : 서울중, 라00675 | 등록일 : 1982년 12월 23일 | 인터넷신문사업등록번호 : 서울 아03244
회장: 임윤식 | 사장: 정희돈 | 편집국장 : 정재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형
Copyright © 2013 오늘의한국.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