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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화가한지 띠로 만들어낸 ‘시간과 기억의 단면’ 감동
박관식 기자  |  webmaster@k-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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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11  14: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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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얼마 전 치매에 걸려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리면서 작업한 것입니다. 머리에서 문제가 생겨 언어장애가 왔지만 감정은 살아 있었지요.”

전시장 들머리의 「Neo Letter」란 작품을 설명하는 작가의 눈가에서 언뜻 이슬이 내비친다. 순간 실내가 어둑해진다. 어찌 더 작품을 논할까.

김수지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이 ‘시간과 기억의 단면’이라는 주제로 지난달 13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M에서 열렸다.

   
 

13일 오후 6시 오프닝 행사에 앞서 많은 지인들과 갤러리들이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김수지 작가의 작품은 본래 동양화적(?)이지 않은 것이 특출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전 타이틀이 과거의 시작과 현재의 흐름을 상징한 것일까?

김 작가의 작품은 우연히 동그랗게 말아본 신문지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잘라진 신문지가 동그랗게 말려진 단면은 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런 모습에서 한지 작업의 다채로운 색감의 조화가 시작됐다.

갤러리 M 김석영 대표는 “지난해 첫 번째 개인전에서 마주한 김수지 작가의 작품은 내게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었다”며 “작품의 제작 방식으로 보면 단순히 한지를 자른 뒤 하나씩 말아 가는 작업이다. 하지만 작품마다 특이한 색감의 조화는 ‘내가 그동안 보아 왔던 한지의 색이 이렇게 아름다웠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석영 대표는 “단순히 종이를 말아간다는 작업, 누구든 종이를 동그랗게 말아볼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김 작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며 “첫 번째 개인전 이후 두 번의 아트페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을 꾸준히 보여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자신 있게 만들어 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김 대표는 “여성의 삶이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 소녀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찾아가는 작가에게 큰 힘과 용기를 전해 주고 싶어 초대전을 준비했다”며 “개인전 이후 바빠진 전시 일정에도 불구하고 초대전 제안을 흔쾌히 받아준 작가에게 감사드리며, 이제 소녀 시절에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만들어가길 기원한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주제 못지않게 깊은 울림 호소

김수지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느낌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이다. 그동안 흔히 봐왔던 동양화와 서양화에 빠져 있었던 시선을 한순간에 조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작품에 몰입하면서 작품 속 주인공과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시 편안해진다. 오히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작품 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로 찾기가 호기심을 유발한 덕이다.

마치 인간 뇌의 한 단면을 잘라놓은 듯이 섬뜩한 느낌은 혼자만의 사유일까 의아해진다. 그런 연유로 ‘시간과 기억의 단면’이란 주제를 떠올린 것일까. 문득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욕망이 출렁인다. 왜냐? 모든 작품의 주제를 일순간에 파악할 처지가 못 되기 때문이다.

‘충돌’, ‘다이빙’, ‘새로운 언어’, ‘회전’, ‘기억의 단면’, ’멈춰 있는 그날의 기억’, ‘변해 가는 것들’, ‘그때 뱉었어야 했던 말들’, ‘색의 심박동’, ‘새겨져 버린 기억’, ‘깊은 물속에’, ‘나이 듦’, ‘봉인 1~8’, ‘깊은 물속은 푸를까?’, ‘깊은 물속은 붉을까?’, ‘고민’, ‘딸에게’, ‘To My Daughter- Blue Dress’, ‘감정의 속마음’, ‘고민’, ‘관계’, ‘불면증’, ‘쉬어 가는 고민’, ‘고민의 시작’…….

전시된 작품의 제목들 또한 주제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호소한다.

이런 연유로 관람객들이 김수지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보고서도 선뜻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저절로 들 수밖에 없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실제로 지난해 첫 개인전에서 우연히 전시장을 찾은 미국 교포 관람객이 작품을 현장에서 직접 구입해 갔다고 한다. 그것도 바로 즉석에서 2점이나 거금을 주고 포장해 간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작가는 “저와는 아무런 면식도 없는 분이 우연히 인사동에 와서 전시장을 돌다가 제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며 “어딘가 무척이나 마음에 끌려 구입하셨겠지만 아무래도 집안에 걸어두려는 인테리어적인 면에서 끌리지 않았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사실 인사동 전시회에 나왔다가 작품을 현장에서 직접 구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무리 작품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선뜻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일이란 그리 쉽지 않게 마련이다.

   
 

무수한 원형과 선이 소용돌이쳐

김 작가의 작업은 얇고 투명한 한지 띠를 한 겹씩 조밀하게 말아 원형이나 사각형의 덩어리로 만든다. 작품 속의 무수한 원형들과 유기적인 선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반복적으로 선회한다.

중심부에서 밖을 향해 밀려나가는 것들이 적당한 크기를 이루어 특정한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일정한 프레임에 의해 강제된 형태가 선험적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종이의 물성을 체적화시킨 작업, 이른바 조각적인 작업이자 오브제 작업에 해당한다.

동시에 납작한 회화적 화면을 유지한 것으로 물감과 붓질이란 전형적인 회화적 매체와 방법론을 대신해 다양한 색상을 지닌 한지(레디메이드)를 선택해 그것을 확장시키고 일으켜 세워 벽에 부착해놓은 평면 작업이기도 하다.

직립한 관자의 시선에 한지를 말아 이룬 형태의 윗면을 응시하게 해주어 생겨난 평면이 그림, 회화가 된 셈이다. 다시 말해, 원형으로 말아놓은 한지 띠의 납작한 면이 회화적인 화면(색채와 선이 자리한)을 형성해서 보는 이의 시선에 풍요로운 시각 이미지를 안긴다.

박영택 미술평론가(경기대 교수)는 “나이테나 식물의 단면을 잘라낸 자리, 덩어리를 날카롭게 잘라내 불가피하게 남겨진 자리, 바깥에 가려져 바라볼 수 없는 내부, 가시적 세계와 무관했던 그 심층의 자리가 순간 노출되면 묘한 쾌감이 발생한다”며 “물론 그것은 잘라낸 단면의 자리가 아니라 단면처럼 보이는, 한지 띠를 감아 형성된 윗부분의 결이 불가피하게 만들어낸 자취”라고 부연한다.

동심원을 그리며 치밀하고 빽빽하게 밀집된 다양한 색상의 한지들이 방향을 달리하면서 꺾이고 밀려 이룬 다채로운 선들로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들이 다분히 기하학적인 형태나 동심원 같은 단순하고도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직하고,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을 유발하거나 색채의 장력을 이용해 시각적 착각을 다룬 옵아트적인 화면을 창출한다.

이 결과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와 함께 묘한 환각을 선사한다. 이는 무엇보다 한지 띠들의 겹침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선(결)이 결정적이다.

이에 대해 박영택 교수는 “한지 띠와 그것들이 이룬 자연스러운 물결과도 같은 선으로 이루어진 이 작업은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재료 체험으로부터 연유하는 한편 그것의 확장된 결과로 보인다”며 “이 작업은 다양한 종이의 만남과 관계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얇은 종이의 단면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거나 불충분하다면 그것들이 여러 장 겹쳐 일정한 볼륨을 가지면서 비로소 가시적인 존재로 모종의 화면(회화)이 됐다”고 설명했다.

   
 

다채로운 색채들의 파장이 추상회화 연상

종이의 단면이 모여 결(선)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각기 다른 색상의 한지 띠들이 개입되면서 다채로운 색채들의 파장으로 이루어진 추상회화를 연상시킨다.

이는 레디메이드를 활용해 또 다른 존재로 변용하고 색다른 미적 감수성을 유발시키는 작업의 결과이다. 이런 배후에는 색상의 차이가 긴박한 한지들의 만남과 결합이 치명적이다.

박영택 평론가는 “색의 선택은 직관적이지만 유사한 색채들 간의 긴밀한 조화, 만남이 우선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래서 ‘만남의 양상’이 작업을 규정하고 그 조건이 조우의 발생을 결정하는 셈”이라며 “조우는 만나는 것들을 산출하고, 그런 속에서 어떤 변용을 야기한다는 얘기다. 어쩌면 작가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한지 띠들의 만남, 다양한 색상을 지닌 그것들의 결합과 배열에서 발생한 변용을 감수성으로 흡수해낸다. 그 자연적인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작업을 밀고 나간다”고 평했다.

김수지 작가는 “이 얇고 가벼운 한지 띠를 지속해서 감고 있다 보면 마치 지난 시간과 기억을 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365일 동안 일기를 쓴다면 어떤 날은 무의미하고 또 다른 날은 선명한 기억이 날 것이다. 기쁨과 슬픔 등 감정의 기복을 색깔로 쓴다면 이랬을 것이라는, 마치 뇌를 잘라낸 듯한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전했다.

이어 김 작가는 “「봉인」이란 작품은 ‘봉인된 기억’으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지만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기억, 틀에다 가둬놓은 기억, 그날 멈춰서 꺼내기 싫은 기억을 담았다”며 “물속에서 잠수해 바깥 풍경을 보면 일렁여 보인다. 세상은 푸를지 붉을지 삼차원에 온 세상의 그런 감정을 표현했다. 또한 딸에게 주고 싶은 드레스를 그리며 만든 작품도 있다”고 고백했다.

 

색감이 타고난 작가

사라지고 소멸한 지난 시간의 흔적과 기억들을 차분히 감아내고 집적시켜 그것을 견고한 틀 안에 가두고 싶다는, 그러니까 지질 시대 나무의 진액이 굳어 만들어진 호박 속에 갇힌 곤충들처럼 그것들을 온전히 간직해 봉인하고 싶은 욕망이 현재의 작업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

한지 띠들을 감아 만든 형태를 전일적 시점에서 내려다보면 흡사 지난 시간의 그 모든 자취를 한눈에 조망하는 느낌이리라.

그렇게 집적해낸 기억과 추억은 매번 유사하면서도 이질적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유형으로 반복과 함께 재배열된다.

박영택 평론가는 “가지런하면서도 제각기 다른 선과 주름을 만들며 끊임없이 증식하는 온갖 상념들을 반복적으로 감아내는, 마치 강박적인 행위로 잠수시켜내는 듯한 이 작업은 다분히 자신에 대한 성찰과 치유적인 차원”이라며 “동시에 자기 안의 뭔가에 몸을 만들어주고 가시적 존재를 부여하는 작업 또한 그런 맥락에서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김수지 작가는 결혼한 이후 전업주부로 거의 미술과 담을 쌓고 있다가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다시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끝으로 김 작가는 “주부로 있으니까 아무도 안 도와주더라. 미술 작업을 다시 시작한 계기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외면해 왔던 대학 동문전에 참가하면서 활력소가 됐다”며 “2009년 마이클 잭슨이 타계한 소식을 듣고 만든 작품도 있듯이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엮어내다 보니 뜻밖의 작품이 탄생한 듯하다”고 전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미술이라지만, 김수지 작가의 작품을 보면 그만큼 무척 고생한 티가 난다. 색감이 타고난 작가들은 배워서 되는 것과 달리 하늘이 내려준 은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박관식 기자  webmaster@k-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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