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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박사, 위형윤 교수의 이야기를 듣는다정치를 변화시키는 지식 산업을 세우고 싶다
정정환 기자  |  webmaster@k-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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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07  15: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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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곡(厚谷) 위형윤 교수는 1951년 7월 26일 전남 여수시 율촌면에서 부친 위정량 님과 모친 신복순 님의 7남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9년 2월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5월 독일 튀빙겐대학교에 유학 하여 입학했다. 1984년 본교 어문학부에서 독일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이수하고 1985년 9월 독일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와 대학원 통합과정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그리고 1988년 12월 튀빙겐대학교 박사원에서 박사학위 취득하고 1989년 귀국했다.

   
 

위형윤 교수는 안양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는 신학학부장, 신학대학장과 교목실장, 일우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고 2016년 8월 30일 정년퇴임하여 현재 안양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연구논문으로는 초기 기독교 사회사의 관점에서 본 재산 소유개념, 노동과 휴식, 기독교 경제정의 실천에 관한 연구, 정의와 인권 실현을 위한 실천과제, 자연 생태계와 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연구, 핵무기와 평화신학의 실천 과제, 책임사회 속에서 차별에 대한 인권 실현에 관한 연구 등 60여 편이 있다.

저서로는 신학이란 무엇인가?, 실천신학의 이해, 기독교의 선교사역, 생명윤리와 의료행위, 기독교 사회정의, 목회상담과 심리치료, 기도로 쓴 시편, 500년 역사 튀빙겐대학 등 10여권이 있다. 또한 2003년 공무원문학 수필부문에 등단하여 수필가로서 선물, 다람쥐의 간식, 아들을 위한 기도, 아버지, 어머니, 미국행비행기, 등 수필과 시부문의 다수 작품이 있다.

이번에는 영역을 넓혀 시(詩) 부문에 도전한바, 수필을 통해 그동안 갈고 닦은 글쓰기의 기본 위에 시의 집을 짓고 있다. 그는 굴곡진 민족사의 격랑 속에서 60여년을 헤쳐 온 한 인간의 깊은 생각과 짙은 감정을 시(詩)로 엮어내고 있다. 2017년 1월에는 한국공무원문인협회로부터 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아울러 민족분단의 아픔을 군 복무시절에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형상화한 'DMZ의 안개'라는 작품 한수를 감상해 본다.

 

                  DMZ의 안개

 

풀잎 눈망울에 이슬 맺혀

눈물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안개는 살며시 바다를 이룬다.

 

엊저녁 긴- 雜音 속에

묻혔던 先烈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가로 세로 거미줄이 엉켜진

오솔길 사이로 안개는 沈默을 드리운다.

 

다하지 못한 高地占領도

쓰다 못한 한통의 편지도

아직 아물지 않는 상처 위에

안개는 아침 山野를 감추고

남과 북의 血肉이 끊어진 철책사이로

너는 끈질기게 바다를 이루리라.

 

여기, 나 조용히 선열의 墓앞에

이슬 맺힌 군화를 벗고 기도드리면

또 하나의 세계는 平和롭도다.

 

-최근에 2017‘ 공무원문학 ‘신인상’까지 수상했는데, 우선 소감은?

마치 덜 익은 과일을 내놓은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사실은 작고(作故)하신 한기양 교장 선생님과 격의 없는 대화와 친분으로 평소 존경하던 김남웅 교장선생님과 김성년 회장님을 소개 받아 2003년 수필에 등단했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글을 써 왔는데, 김성년 회장님께서 갑자기 교통사고로 작고하심으로 나의 글쓰기도 당분간 중단된 상황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하순명 회장님과 임문혁 선생님, 그 외에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내 인생의 작품방향도 좀 바뀌게 됐습니다. 시와 수필을 동시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순명 회장님의 지도로 몇 번 나름대로 시를 써서 선생님께 교정을 구한지라 수필과 시는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부족한 글을 다듬어 주시고 시로써 추천하여 이렇게 신인 작품을 내 놓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와 수필, 소설을 좋아하여 일명 문학 소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정년퇴임하는 이 순간에 어린 소년시절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고,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시로써 내 인생을 정리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무엇보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독일에 유학하게 된 동기와 유학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1983년에서 1989년까지 약 7년 반 동안 독일 남부도시 튀빙겐 시에 있는 세계적 명문대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과 어학, 등을 공부하고 돌아 왔습니다. 7년 반 동안 있으면서 제일 어려웠던 것은 경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튀빙겐 시에서 가까이에 있는 신델핑겐 시의 50만이 일하는 다임물러 벤츠 자동차 공장에서 매년 여름방학 6주 동안 일하고 1년을 살 수 있는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물론 해외에서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6주 만 일하고 공부에 전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도와주신 아래의 세분의 은인이 있어서 독일 유학생활이 빨리 끝날 수가 있었던 것이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들이셨습니다. 나에게는 먼저 잊지 못할 베로니카 독일어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한국 세검정에서 호만에움이라는 독일어 학원의 독일어 회화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학원이 설립되기까지는 독일인 호만이라는 분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김규철 원장께서 호만에움이라는 독일어 학원을 창립하시어 한국의 유학생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독일어권 선생님들을 영립하시어 많은 유학 지원자들에게 독일어를 이수하도록 공헌을 하신분입니다.

이 학원에 내가 첫 입학을 한 것은 1981년이었으며, 특히 베로니카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것은 매 시간마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고 발음도 정확하게 교정해 주셨으며, 인간적으로도 서로 식사에 초대해 주셨고, 독일의 음식문화와 관광정보를 잘 안내해 주셨습니다. 힘든 나의 독일어 공부는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어학실력을 독일어에 자신감을 갖게 하였고, 독일어를 배우는 데는 여간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에 호감을 갖게 하여 결국 독일 유학의 꿈을 실현하게 됐습니다.

다시 화제를 바꾸어 보면 나는 한국의 호만에움에서 독일어 기초와 중급 어학을 끝내고 독일 대학에 여러 군데 입학허가를 신청했는데 유독 튀빙겐대학교 한군데서 신학전공과 철학 부전공으로 석사과정으로 입학허가서가 나왔다. 나는 결혼 한지 겨우 2년 후 갓난아이들과 집사람을 뒤로 한 채 무작정 독일 튀빙겐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한국 호만에움 김규철 원장의 친구인 성종현 박사를 소개해 주어 그 힘만 믿고 겁 없이 낯 설은 독일 튀빙겐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드디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나를 마중 나온 이상재 선교사의 집에 잠간 들러 그의 안내를 받아 기차를 타고 4시간 독일 남부의 수도 슈투트가르트 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나를 마중 나온 젊고 깨끗한 미남의 성종현 박사(당시 유학생)을 만나 나를 튀빙겐으로 안내 했습니다.

성종현 박사의 아우디자동차에 내 몸을 실었을 때 어두운 밤이었다. 한참 자동차로 튀빙겐 가는 길은 어느 시골 준 고속도로로 언덕을 넘고 푸른 잔디밭을 한참 가고 있었는데 숲속 쉬밭츠발트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숲속 길이 나타났다. 그곳이 지금의 베벤하우젠 가는 길이 아닌가 싶었다. 이윽고 사거리에 신호등이 정지 신호를 알리었고, 곧장 우회전 하니 그곳이 지금의 마틴스 교회 사거리가 아닌가 싶다. 언어가 다르고 도시 환경이 다른 낫선 튀빙겐, 그곳은 나를 압도하였고, 나의 기를 꺾었다.

저를 안내한 성종현 선생은 바로 그곳 사거리 우측 첫 집 4층 옥탑 방에 사는데 완전히 이국적이었고, 초인종 벨이 입구에 있어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없이 걸어서 4층까지 올라갔었다. 마침 사모님은 병원에 짖즈박헤(야간근무)로 병원에 가셨고, 성종현 선생께서 설거지며, 아들 세인이와 딸 유리를 도맡아 키우셨으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난 이곳에서 처음 독일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세하고 세밀한 그러면서 털털하고 모나지 않으신 성종현 박사님은 은퇴한 지금도 그 성격 변하지 않고 간직하고 계신다. 매번 식사 때마다 자녀를 위한 기도, 저의 앞날을 위해 기도해주신 그 고마움, 한국에서 목회를 하고 지쳐있는 나를 기도로 친절하게 베풀어 주신 인자하신 성종현 박사님! 그분은 내 영원한 은인이며 평생 잊지 못할 유학생활의 첫 인도자이시다. 그분의 그 인자하신 성격과 자녀를 위한 기도 때문에 오늘 아들은 삼성의료원 전문의, 딸은 탈렌트로 하나님께서 훌륭하게 성장시켜 주신 은혜인 듯싶다.

   
 

-해외 유학 중 어려웠던 대목과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었다면….

유학생활 중에 제일 큰 문제는 강의를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노트 필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독일 학생들에게 물어보기도 수십 번 하고, 노트도 빌려서 베껴서 이해해야 했다. 그런 후 꼭 1년 반 만에 많은 교수님들의 강의를 수강하는 중에 마음에 호감이 가는 교수 한분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분은 눈과 키가 큰 미남의 교수님 한스 마틴 뮬러(Hans Martin Müller)박사이셨다. 그의 강의를 듣는 중에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잘 들리는 것이다.

마치 한국말 듣는 것처럼 귀가 뚫리고 노트 필기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의심해 보았다. “내가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옆에 있는 독일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하면서 뮬러 교수님께서는 말을 굉장히 빨리 하셔서 자기들도 놓치기가 힘이 드는데 잘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모든 생활이 기쁘고 즐거웠다. 교수님과 토론하고 논문 지도를 받을 때 일일이 세심한 부분까지 친절히 지도하여 주셨으며, 내가 튀빙겐 쉬팁트 교회(Stift Kirche) 앞에 헤르만 헷세가 일했던 조그마한 헌책방에서 신학서적을 구입하여 올적에는 자료수집의 대가라 칭찬하면서 자기에게 있는 고서들을 선물하는데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낡은 소가죽 책가방을 선물로 받은 적도 있었다.

나의 스승 한스 마르틴 뮐러 박사께서는 독일교회 젊은 목사들을 자기 집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나와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또한 박사 구두시험 볼 때에는 사모님께서 내 걱정하시느라 아침식사를 체할 정도로 걱 정과 기도로 보살펴 주셨다. 바로 여기에 내가 뮐러 교수님을 지도교수 로 선택하여 신학공부하게 된 동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학 위시험이 끝나고 나는 교수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뵈러 갔을 때 교수님께서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손수건을 꺼내 닦는 것이었다. 옆에 서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모님은 “언제 다시 볼거나” 하면서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면서 “하늘나라에서나 만날까” 하면서 엉엉 울어 버린 것이다. 독일 노교수 부부의 사랑의 눈물과 순박한 사랑의 유산으 로 다시 태어난 한국인 나는 교수로서 비록 정년퇴임을 했지만 이 땅위 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대학 교단생활 중에서 보람이나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나의 삶과 활동은 주로 대학 강단에서 있었다. 교수생활은 가르치는 일과 학회활동, 저서활동, 그리고 사회봉사 활동이었다. 우선 교수생활은 학문연구와 전공강의에 충실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계를 느끼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그대로 전수 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서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 저서활동을 한 결과 이제 제법 내 것이라고 할 만큼 내놓으니 이것 또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내 것이라고 했더니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모방하고 인용한 것에 불과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진실한 내가 아니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찼으며 내 것이라고 새롭게 만들어 놓았으나 이것도 모두 선배들이 한말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동안 일구어 놓았던 논문과 저서들을 많이 내놓게 되었고, 강의도 강의안을 안보고 할 수 있고, 가르칠 만하니 어느새 나이 들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다. 진짜 내 것을 가르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슬퍼진다. 교수들은 매년 업적평가를 받게 되는 데, 연구업적과 교육평가, 사회봉사 활동, 등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특히 부지런히 연구하고, 강의를 잘하는 일이다. 이러한 활동은 강단에서만 아닌 사회활동 속에서 실현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 대학에서는 ‘한구석밝히기’라는 이념을 가지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나도 같이 사회활동에 참여 한바 있다.

이 이념은 남의 일을 간섭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어두운 구석을 치유하고 밝히는 운동이다. 어두운 무지를 밝히고, 소외된 자를 찾아 치유하고 도울 뿐 아니라, 무기력에 빠져 있는 무위도식하는 인간 문제들을 어떻게 새롭게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가? 그리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자구 노력이다. 또한 학문 활동이 교단에서만이 아닌 사회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괴리현상, 이중구조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점이 학자로서 제일 어려운 점이었다.

 

-성공사례로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좌우명이나 덕담을 한마디 해주셨으면 합니다.

언젠가 작고하신 안양대학교 명예총장이신 김영실 박사께서 나에게 건네준 말이 있다. 활자를 눈에서 멀리 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책과 신문을 멀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讀書를 하지 않으면 그 입에서 가시가 솟는다고 말했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에 사악이 가득하고, 너와 나의 이중구조를 만들고 서로 싸움의 터로 만든다고 했다. 거짓으로 가득차고 양심이 마비되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어두움에 처하여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읽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될 수 없고 알지 못하니 무지하게 되고 무식하게 된다.

둘째는 나의 목회적 스승이신 김학만 목사께서 하신 말씀으로 家和萬事成이다. 가정이 행복해야 모든 것이 행복하다. 불행은 가정으로부터 오고 행복도 가정으로부터 온다. 가정이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쉽게 풀리는 법이다. 여기서 법이 나오고, 양심이 밝혀지고, 행복과 사랑이 싹터서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때 덕(德)이 세우진다. 덕을 세우는 일이란 무엇인가? 서로의 이익을 위한 배려하는 마음이다. 흔히 젊은이들은 가정보다 친구를 더 선호한다. 친구보다 가정을 더 돈독히 할 때 친구 관계도 좋아 지는 법이다.

 

-미래의 바른 사회를 위한 꿈과 희망, 또는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바른 사회를 위한 비전은 우리사회의 보수와 진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개인주의의 팽배, 사회 정치계는 흑백논리로 가득하고, 종교계 역시 聖과 俗으로 가득하다. 경제계는 노사의 갈등과 자본의 독식으로 인한 꼼수, 가진 것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 철저한 독식이라는 이중구조 속에서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사회의 미래는 법질서 회복과 공공성 회복이 답이다. 그래야 희망이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노사 갈등의 문제는 자본도 중요 하지만 생산 라인을 중요시 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이 중요하고 그 라인에 진실하게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라인에서 물건을 잘못 만들고 투자를 게을리 하면 자본의 허실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자본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보편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기본적 보편적 삶이 보장되고, 법과 공공성이 확보될 것이다.

또한 경제계는 종교의식이 뒷받침되어 주어야 한다. 종교의 정신의식, 영혼 각성은 육체를 깨우고, 건전한 윤리의식을 회복하고 인간성을 회복하게 되면 상생의 원리는 회복되고 공동선이 이룩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매년 2월이 되면 가면무도회라는 것이 있다. 귀족과 천민이 똑같이 가면을 쓰고 하나가 되는 문화의식이다.

가면을 쓰면 양반이 천민이 되고 천민이 양반이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때 특권 의식이 없어지고 마음의 통교가 일어나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이다. 어울리는 인격훈련이 학교 교과에서 가르쳐져야 한다. 누가 일등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훈련이 없는 기능주의는 기계적 사람을 만들고 살벌한 사회로 전락하고 말게 될 것이다. 미남을 보고 사랑을 느끼는가? 사랑하니까, 예뻐지는가? 그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을 하니까 예뻐지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책을 눈에서 멀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지녀왔기에 미래를 향한 큰 의미에서 지식산업을 창조하는 일에 헌신을 다할까 생각한다. 그것은 교단에서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저술활동을 남은 인생기간 동안에 하고 싶다. 수필과 소설, 그리고 시를 쓰면서 인생을 술회하고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정치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다고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변화시키는 지식 산업을 세우고 싶다. 정치가 변화되어야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는 것이며, 그 길은 지식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정정환 기자  webmaster@k-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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