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문화
신비로운 중국대륙, 배낭 메고 만난 소수민족( 4)꾸이저우,란저우,시닝,꺼얼무
김정일  |  kobukim40@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10.08  13:08:4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고국을 떠난 지 벌써 15일이 지났다. 그동안 운남성의 쿤밍, 스린, 다리, 리장, 상그릴라, 푸얼시, 시솽반나를 둘러봤다. 전체 26일 일정의 중반이 됐다. 다음 여행지인 꾸이저우성 꾸이양으로 향했다.
쿤밍역에서 황과수폭포로 가기 위해 꾸이양으로 가는 침대칸 열차를 이용했다. 열차 안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인심 좋게도 과일을 건네며 황과수폭포에 가려면 꾸이양보다 안순에서 내리라고 알려 준다. 소수민족들이 많이 사는 성도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꾸이양행 표를 구입했지만, 현지인의 조언에 잔여금액을 환불받고 안순에서 내렸다.

   
 

아시아의 최대 폭포 황과수 폭포
이른 새벽이라 버스가 없어 택시를 이용했다. 그런데 개통한지 얼마 되지 않은 도로에다가 산속을 과속으로 달려가니 상쾌하기 보다는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자동차 타이어가 터져 한쪽 도로변에 세우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어둠이 벗겨져서야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전체면적 90% 이상이 산지라서 그런지 평지는 찾기 어려웠고 동서남북이 온통 산들로 싸여 있었다. 그 아래로는 다랭이논(계단식 논)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고 30여 분을 달려 황과수폭포 정문에 도착했다. 새벽의 조용함 속에서 한적한 시골마을의 평화가 감돌았다. 마을매표소 문이 열리기 전까지 그 곳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에는 분재공원이 있다. 한국에서 보던 분재보다는 훨씬 컸다.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수백그루의 희귀한 분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 표지판에 한문, 영어, 한국어, 일어 순으로 표기되어 있는걸 보니 반가웠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나라 민요 ‘도라지 타령’이 흘러 나와서 감격스러웠다.
이어서 폭포쪽으로 들어섰다. 폭포 소리가 우리를 빨아들일 것처럼 거세고 우렁찼다.
황과수폭포는 높이 74m, 너비 81m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의 크기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폭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 하, 좌, 우 ,앞뒤 여섯 위치에서 바라 볼 수도 있다. 수량이 많은 7월인데 비까지 내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여러 각도에서 황과수 폭포를 카메라에 담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우리 일행뿐이었다. 알고 보니 폭포로 내려가는 산책로가 있어 다른 사람들은 그 길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이었다. 정보 부족으로 요금을 내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 것이다.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마침 비가 그쳤다. 그래서 다시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 봤다. 새소리, 폭포소리가 어우러져 산책코스로는 제격이었다. 산길과 폭포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아왔다.
황과수 폭포 이외에 높이 21m, 폭 105m의 도포당폭포와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적인 천생교폭포가 또 있었다. 폭포를 보기 위한 입장료 한 장이면 하루 동안 셔틀버스로 를 이용해 다른 폭포도 둘러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일행과의 일정으로 필자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안순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국인과 가장 비슷한 묘족
중국에는 총 56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구이저우성에는 17개의 소수민족들이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생활했다.
통계에 따르면 4,000만에 가까운 인구 가운데 1,400만 명 정도가 소수민족으로 전체 인구의약 3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소수민족은 묘족(苗族)이다. 그 다음으로는 포의족, 동족, 토가족 순이다. 묘족은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수민족 중 하나로 황하유역과 양자강 하류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재미있는 것은 묘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동이족의 한 갈레이며, 우리 한민족과 같은 피를 나눴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이들의 문화가 보존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코스로 움직이기 위해 쓰촨성 청두행 버스를 탔다. 귀양에서 520km 떨어진 청두는 중국 서부 여행지의 출발지이자 티베트로 가는 관문 도시이다.

삼국지의 고향 청두
청두시 외곽에 도착했다. 유서 깊은 청두는 전국시대부터 쓰촨성의 중심도시이며, 2000여년 이상 발전해 온 역사와 문화도시이다. 삼국시대 촉나라 시절에는 유비가 수도로 정했던 곳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역사를 만들어온 도시답게 많은 사적과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필자는 몇 년 전 두장엔, 주자이거우, 황릉, 어메이산, 러산대불과 같은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보았기에 이번에는 무후사, 두보초당, 청양궁을 둘러보는 것에 마음을 두었다.

유비와 제갈량의 사당 무후사
아침식사는 숙소 아래 식당에서 빵으로 간단히 마쳤다. 그러고는 삼국시대에 관련된 유비의 묘와 공명의 묘가 합사되어 있는 무후사를 찾았다. 원래 이름은 한소열묘였다. 제갈공명의 묘와 합사되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유비보다 더 인기가 있는 제갈공명의 시호인 충무후를 본떠 무후사로 불리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당대에 세워진 당비와 가장 먼저 만난다. 당비는 문장, 서법, 석각,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소열전(유비사당), 무후사, 혜릉이 순서대로 나온다. 소열전에 들어서니 황금색으로 도색한 유비상과 함께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상이 함께 있다. 소열전과 무후사 사이 화랑에는 조자룡, 마초, 강유 등 28명의 가신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다. 제갈공명을 모시는 무후사는 소열전 안쪽에 있으며 제갈공명은 가신이므로 소열전(유비사당)보다 한 단 낮게 꾸며져 있다. 조금 더 안쪽에 있는 붉은 벽의 곡선으로 된 길을 따라가면 유비의 묘인 ‘혜릉’에 이른다. 이처럼 주군과 신하가 같이 모셔진 사당은 중국에서도 무후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두부초당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두보가 ‘안사의 난’ 이후 759년부터 3년간 살면서 240편 이상의 시를 지은 곳이다. 두보가 머물 당시에는 초막 한 채가 있는 작은 규모였지만 명?청나라 때 20만㎡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문에서 대나무와 동백 등의 수목이 울창한 길을 따라가면 두보의 동상과 시사당이 나온다. 그 옆으로는 각국 언어로 번역된 두보의 시집을 비롯하여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안쪽으로는 본체가 있었다. 필자는 뒤쪽에 위치한 정원까지 둘러보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청양궁을 걸어서 찾아갔다.

   
 

도교사원 청양궁
청양궁은 도교의 시조인 노자가 파란색 양을 데리고 이곳을 오갔다는 고사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매년 음력 2월15일부터 한 달간 노자를 기리는 도교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당대에 창건했으나 현재 건물은 청대에 재건된 것이다. 삼청전, 팔괘정 등 주요 건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하지만 란저우로 가기 위해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큰 규모의 모습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역에 도착해 란저우로 가는 침대열차에 오르니 양쪽으로 6명이 타도록 되어 있었다. 더운 날씨 탓에 많은 사람들이 침대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눴다. 창밖으로는 나무가 없는 산과 누런 황하 물만이 흘렀다. 밤이 깊어지자 침대에 오르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기차는 어둠을 뚫고 란저우를 향해 달려갔다.

감숙성의 성도인 란저우
인구 270여만 명으로 한 대에는 금성이라 했으나 수,당대에 이르러 이름이 바뀐 란저우. 그곳은 예로부터 실크로드로 가는 요충지로 한족 이외 후이족, 티베트족, 몽고족 등 43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란저우는 산을 끼고 흐르는 황하를 따라 발전한 도시라 동서로 가늘고 길게 형성돼있다. 시가지는 기차역과 오천산공원, 백탑산 공원을 연결해서 잇는 대로가 중심가다. 일행은 란저우역에 내려 역 앞에 우정빈관에 짐을 풀어 놓고, 버스터미널에서 다음날 시닝으로 갈 버스표를 구했다.

황하에 처음 만들어진 중산교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찾아간 곳은 황하에 처음 만들어진 240m 길이의 중산교다. 이 철교는 1907년 독일인 기술자에 의해 건설됐다. 정식명칭은 황허란저우테차오(黃河蘭州鐵橋)이었으나, 근대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쑨원의 이름을 따 1942년부터 중산차오라 불리게 되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현재는 자동차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다. 철교 광장에는 거북이 등 위에 ‘황하제일교’라고 써있는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철교 밑으로 누런 흙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중산교 건너편에는 해발 1,720m에 위치한 백탑산공원이 있다. 원나라 때 건축해 명?청시대 때 증축했다. 높이 17m의 7층 8각 백탑이 있어서 백탑사공원이라고 한다. 올라가 보니 시가지와 황하가 흐르는 것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다시 오천산으로 가기 위해 12번 버스를 타고 오천산공원 입구에 내렸다. 큰 건물 중앙에 편액 오천산이라고 크게 쓰여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름의 뜻을 찾아봤다. 한무제 때 곽거병 장군이 흉노를 정벌하러 하서회랑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병사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이곳에 올라 검으로 땅을 찌르자, 다섯 군데에서 물이 솟았다고 하여 오천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간루취안, 후이취안, 쥐웨취안, 모쯔취안, 멍취안이라는 5개의 샘이 있다. 그래서인지 공원에 들어서자 바로 곽거병 장군 동상이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듯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옆으로는 공자행교상이 서 있고, 이어 중산기념관에 앞에는 손문 동상이 서있었다. 그 위로 올라서니 도교와 불교사원인 듯한 수십 채의 건물들이 즐비했다.

시닝시를 관통한 황하
이튿날 시닝으로 갔다. 책에서 소개하기를 란저우에서 시닝까지의 협곡은 끝없이 흐르는 황하의 붉은 물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멋진 길이라 하여 기대가 컸다. 하지만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라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드물었다. 그런데 멀찍이 보이는 농가에서 밀 알곡식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도리깨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정겨웠다.
시닝역은 산 밑에 위치해 있고 앞으로는 황하물이 넘실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시닝은 청해성의 성도로 정치, 경제,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이지만 색깔이 바랜 건물, 도로 위를 다니는 버스나 택시도 상점의 물건들도 다른 도시에 비해서 화려하지는 않았다. 시가지에서는 가끔씩 검붉은 얼굴에 따스한 미소를 띠는 티베트 사람들 과 승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시 시닝에서 꺼얼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길 주변은 나무가 없어 황량하고 도로에는 먼지만 뿌옇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십 여 명의 아주머니들이 먼지를 피하려고 얼굴과 머리를 보자기로 감싼 채 소형 트럭에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의 삶을 머릿속에 으로 상상하며 그려 보는 사이 두어 시간이 지났다. 어둠이 짙어지자 황원 협곡도 당나라 문성공주 동상이 서 있는 일월산도, 해발 3260m의 중국 최대의 염호 청해호도 쏜살같이 어둠 속에 묻혀 지나가고 있었다.

   
 

해발 2,800m 도시 꺼얼무
꺼얼무역에 도착했다. 역은 상당히 컸다. 청하이성에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꺼얼무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신흥공업도시다. 해발 2,800m로 중국 내에서 육로로 티베트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거점도시다. 꺼얼무가 라사로 가는 길목이기는 하지만 라사까지의 거리는 1,166km나 되며 해발 5,000m가 넘는 산을 넘어야 한다. 더불어 티베트로 가려면 필요한 입경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필자 일행도 기차에서 내려 아침 식사를 하고 라사로 들어가는 허가서를 신청하기 위해 국제 여행사로 갔다. 도착해 물어보니 허가서를 받으려면 약 일주일정도 시간이 걸린다 하여 다시 시닝으로 돌아가는 열차표를 구입했다. 어렵사리 찾아온 꺼얼무를 너무 쉽게 떠나려 하니 아쉬움이 커서 열차 시간 전까지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나무가 거의 없는 꺼얼무 시내인데 한 곳에 나무가 무성한 곳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입구에는 초가집 풍의 대문에 취죽원이라는 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필자를 반기듯이 후이족 복장을 한 어린이들이 있었다. 필자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은 안 통했지만 그 어린이들과 잠깐 눈빛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공원 안에 있는 호수의 구름다리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어린이들의 맑은 눈빛과 모습이 자꾸만 여운으로 따라왔다.

티베트 라사 사람을 만나다
산책 중에 라사에서 이사 온지 얼마 안됐다는 부부를 우연히 만났다. 라사를 가기 위해 먼 길을 왔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밤차로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구름다리에서 라사 사람을 만났으니 꿈이 이루어 진 듯 반갑고 감동적이었다.
그 가족들도 꺼얼무에 이사와 첫 나들이라고 했다. 그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아동공원, 꺼얼무광장을 구경했다. 라사를 가지 못하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니 민족촌에 산다 하면서 그들의 집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거리가 멀다고 해 택시를 대절하여 장강 원촌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마을입구에는 꺼얼무 장강민족학교라고 한문과 티베트어가 병기되어 있다.
그런데다 수 십여 채의 단층으로 된 슬라브 집들이 모여 있다. 그들의 집에 들어서자 먼저 남편의 목공소를 보여주고 단조로운 방까지 구경 시켜준다. 방안에는 옷장과 서랍장, 벽에는 평원에 여러 마리 말을 수놓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라사 가족과 우리 일행은 레스토랑에서 고급요리로 식사를 했다. 라사를 보지 못해 아쉬워했던 필자는 그들로부터 생생한 정보를 얻어 기분이 좋았다. 부부의 아들은 화공이라했다. 그래서 필자가 용띠라고 하자 즉석에서 용을 그려 주기도 했다.
식사를 하고 헤어질 시간이 돼 오늘의 만남을 고맙다는 뜻으로 집에 갈 때 차비라도 쓰라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내밀었지만 극구 사양했다. 도리어 우리 일행보다 먼저 나가서 식대를 내려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결국 식대는 우리가 지불했다. 그들은 결코 넉넉하지 않은 삶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수많은 사연과 긴 세월에 거쳐 모은 돈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처음 만나는 외국인에게 베풀려는 모습은 그 가족들과 석별인사를 나누고 발길을 돌리는 필자의 마음에 훈훈한 추억으로 남게 했다.

 글/사진 김정일
김정일 여행 작가는 중앙대학교 졸업, 정보통신부 홍보담당관으로 정년퇴직했으며 저서로는 <나 같은 공무원과 이야기 하고 싶다> <우체국도 은행일 한다>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총동창회 고문과 재경정읍시민회 부회장 직으로 활동 중이다.

김정일  kobukim40@naver.com

<저작권자 © 오늘의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경기도 “기획부동산 불법 거래 잡아낸다”
2
‘디네앙블랑 서울 2023’ 개최
3
박형준 특사, 부산박람회 유치 위해 아프리카 3개국 순방
4
노관규 순천시장, 2023정원박람회장 전역 현장 점검
5
울릉군, 日 시마네현 '죽도의 날' 제정 철회 규탄 대회
6
해남군, 대한민국 '김산업 메카'로 등극
7
인천시민원로, '재외동포청' 인천유치 지지 선언
8
2023년 '아오자이 축제' 개최
9
평택시, 2024년도 국‧도비 예산확보 총력
10
[Focus] 최태원 SK회장, '글로벌 ESG' 협업 강화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4558) 서울시 중구 마른내로72 인현상가 428호 | 대표전화 : 02-2272-4109 | 팩스 : 02-2277-8959
잡지사업등록번호 : 서울중, 라00675 | 등록일 : 1982년 12월 23일 | 인터넷신문사업등록번호 : 서울 아03244
회장: 임윤식 | 사장: 정희돈 | 편집국장 : 정재형 | 편집인 : 조순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형
Copyright © 2013 오늘의한국.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