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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중시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이승만 시절 뿌려진 산업화 씨앗들 ‘한강의 기적’ 일구는 초석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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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03  1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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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분단 70주년, 광복 70주년이다. 그리고 건국 67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왕조시대에서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격변기에서 대한민국의 전환점에 서 있었던 인물 이승만 대통령은 숱한 논란의 정점에 서야 했다.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건국의 위대한 대통령인가? 아니면 12년 장기집권 끝에 하야해야 했던 반민주적 독재자인가?를 두고 역사가들은 저마다 극과 극의 상반된 평가를 내리면서 팽팽히 맞서왔다. 그야말로 그는 건국의 아버지라는 영예와 독재자라는 오욕을 넘나들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제감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광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행동했던 독립운동가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우후죽순 일어났던 수십 개의 국가들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 선진국대열에 들어간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20-50클럽에 가입돼 있으며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자 세계 10위권의 해양력을 보유한 나라로 성장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눈부시게 성장할 수 있게 한 밑바탕에는 박정희 시절 산업화와 이승만 시절에 뿌려진 산업화의 씨앗들이 원동력이라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을 새롭게 조명해야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과 건국 과정에서의 이승만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되새기고 그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총리 후보에 올랐다 사퇴한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은 <문창극의 역사읽기>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지난해 여름 나는 개인적으로 시련을 겪었다”며 “그 사건의 밑바탕에는 잘못된 국가관과 역사관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고치지 않고는 이 나라의 장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책 쓴 동기를 밝혔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우리가 해방 후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었고, 6.25 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이 태어나는 시기는 한국사의 격동기였다. 개화기의 문명이 태동하는 시기로 구문물과 신문물의 충돌로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려는 노력과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이 일던 때였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었다. 3살 때 한양으로 이사해 11살 때부터는 남산 아래 우수현에서 살았다.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의 15대손이었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 몰락한 집안이었다.

이승만은 13살 때부터 조선시대 입신출세의 길인 과거에 매년 응시했으나 부패한 제도 때문에 번번히 낙방했다. 좌절감에 빠졌던 이승만의 인생은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발발과 함께 갑오개혁이 시작돼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던 것이다. 이에 이승만은 서양문물을 배우게 된다.

배제학당에서 개화파의 거두 서재필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 이승만. 그는 서양사와 국제정세 특강을 맡은 서재필로부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개념을 익히고 서재필의 권유로 조직된 토론모임인 협성회에서 계몽적인 취지부터 정치개혁과 외세배격의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의식을 키워나갔다.

배제학당에서의 시간은 이승만을 서구지향적인 개혁가로 변화시켰다. 그는 미국의 정치제도와 민주주의의 자유, 평등, 법치주의 사상에 주목했다. 배제학당을 졸업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주필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진취적인 사상을 펼쳤다.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가 정부의 이권을 요구한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큰 방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끈질긴 후속보도로 열강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를 계기로 언론인으로써 이승만은 점점 알려지게 된다.

1898년 3월 10일 종로거리에서 한국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가 열렸다. 열강의 인권침탈을 규탄하는 만민공동회가 열린 것이다.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섰다.

“만일 남이 나와 친하다고 하여 내 물건을 달라고 한다면 도적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러시아는 각종 이권요구를 철회했다. 만민공동회 이후 이승만은 급진적 개화파 박영효의 고종폐위운동에 연류 돼 투옥된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그를 조선 기독교 지도자로 키우고자 했던 선교사들은 각종 서적을 넣어주었다. 그가 감옥에서 읽은 책의 목록을 기록해둔 옥중독서일지를 보면 그중 이승만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친 책은 영문잡지 아웃문이었다.

현재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엔 영문잡지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승만의 청년시절 사상을 연구한 이정식 교수의 말에 따르면 당시 자료를 찾아보면 아웃룩 편집장의 사상이 이승만의 마음을 끌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분이 가지고 잇던 사상이 상당히 자유적이었고 미국 대학생들 중에서 미국에서 제일일인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가졌던 분입니다. 그래서 이승만이 그 잡지를 읽음으로 해서 자유사상이라고 할까? 기독교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미 대통령에게 대한독립 위해 미국 지원 호소

루즈벨트, 무능하고 내부적 갈등 겪는 대한제국 부정적

이승만은 감옥에서 1904년 2월 인천앞바다에서 조선에 각종이권을 놓고 벌이는 러일전쟁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이 때문에 영한사전집필을 중지하고 <독립정신>을 펴낸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는 세계에 개방해야 한다’, ‘새로운 문물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라’, ‘외교로 국권을 지켜야 하며 자유를 소중히 여기자.’ 자주독립을 위해 백성의 교육과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1904년 민영환 등의 혁신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다. 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1904년 11월 4일 29세의 나이로 독립보존요청이라는 중요한 임무와 함께 미국유학을 떠난다. 서울을 떠난 지 56일 만에 미국에 도착, 8개월 후인 1905년 8월 5일 외교관 복장을 한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 대표 윤명구와 함께 미국 한 휴양지에 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일본에 가기 전 하와이에 들른 미국무장관의 소개장 덕분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이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내밀었다. 청원서는 자신들은 8천명 하와이 교포들의 대표이며 고종황제가 아닌 1200만 백성의 민의를 대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의 러일전쟁 중 각종 침략과 배신행위를 비난했다. 그리고 조미수호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 독립의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이 내용은 미국신문에 실렸다. 이승만은 일본의 이중성과 침략야욕을 강하게 비판하며 미국이 한국독립보존의 도움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현재 루즈벨트의 별장에는 세계 각처에서 남긴 귀한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조선의 전통 나전 칠기가 있다. 나전칠기 뒷면에는 조선의 왕이 보냈다는 글귀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미국은 일본에 대한제국의 종주권을 갖는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던 때였다.

1924년 외교사가 덴데크가 발표한 논문에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좋아했다. 지난 세대 동안의 일본의 발전에 매우 경탄했고. 훗날 일본이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잇을 것으로 생각했다. 러시아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능하고 내부적인 갈등를 겪고 있는 대한제국정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문명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인지 루즈벨트는 공식외교를 통해서 청원서를 제출하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이때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미국뿐 아니라 국내까지도 알리는 계기가 됐고, 당시의 경험은 훗날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자주 사용하는 청원외교와 여론 중시외교의 바탕이 됐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그는 선교사들의 추천서 덕분에 조지워싱턴대 2학년에 편입한 후 미국동부최고의 명문 하버드대학원에 입학한다.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1910년 이승만은 귀국했지만 조선은 이미 망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가 시작된다. 열강들에 둘러쌓인 조국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강대국들과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파리강화회의 등에 대표를 보내는 등 외교활동에 주력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수반에 추대되었고 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한국의 통치권을 이양할 테니 한국을 독립시켜 달라’고 호소하지만 거부당한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승만은 1925년 탄핵되고 그 뒤 미국에서 구미외교문화원 활동을 하며 꾸준히 외교활동을 펼쳐나간다.

그는 김구로 대표되는 항일무장 테러리즘과 대립했으며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나자, 이는 어리석은 일이고 일본의 선전 활동만을 강화시켜줄 뿐이며,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한국이 독립국이 되려면 일본과 싸우기보다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국제 사회에 ‘한국은 자립할 능력이 없는 미개한 국가’라고 선전하고 있었으며, 한국인의 무장 봉기가 있을 때마다 미국 내 여론이 오히려 일본에 동조하는 분위기로 바뀐다는 게 이승만의 판단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김구가 취임하고 그는 구미외교문화원 활동에 주력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34년 이승만은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다.

특히 그는 미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곧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저서를 출판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그의 책은 큰 주목을 받는다. 2차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은 미국하와이주의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군기지에 기습공격을 한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끝없이 한국의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끈질긴 설득은 결국 미국이 카이로 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게 된다. 특히 그는 ‘미국의 소리’라는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면서 한국은 곧 독립한 것이고 그날을 휘해 겨레의 단결을 호소해 많은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게 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 제국은 항복하고 한국은 해방된다. 미국에서 라디오로 이 소식을 감격해 마지않으며 그해 10월 16일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온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조국의 현실은 암울하기만 했다. 이북은 소련군이 주둔하며 북한 정부가 수립되고 남한 내에서는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첨예하게 이념대립을 했다. 이승만은 김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김구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한민족이라는 이상으로 한반도 단일 정부를 지지해 자칫 김일성에게 이용당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단독 정부 수립의 여부를 놓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구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뛰었던 반면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민주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948년 5월 10일 결국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시행됐다.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천명하고 인정받는다. 하지만 풍파의 연속이었다. 오랜 기간 미국에 체류했던 이승만에게는 국내 기반이 취약했고 새로운 정부에서 일할 만한 능력 있는 인물들과 실무자들은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누구보다 독립을 열망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하루빨리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 인프라를 정상화시켜 한 국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강력히 요청해 미국이 한반도에 파병을 하게 만들어 남한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켜낸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에 맞서 독도를 실효 지배해 오늘날까지 독도가 우리의 영토가 되는 중요한 근거를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 18일 국무회의를 거쳐 ‘평화선언’을 단행했다. 당시 일본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맥아더 장군이 ‘맥아더 라인’으로 체결한 일본의 어업은 일본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체결이 끝나갈 즈음 이승만 대통령은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얀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발표했다. 미국과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호칭하며 강력히 철폐를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선’이라고 주장하며 이 선을 넘어오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다. 이 평화선은 1965년 6월 한일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사실상 철폐됐다.

   
▲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행렬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4사5입 개헌으로 오늘날까지도 독재자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로 인해 이 대통령은 사실상 대통령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일어난다. 이승만이 대통령 당선은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로 인정받던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이 불확실하자 이기붕의 주도 하에 최대의 부정선거가 치러진다.

이 때문에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은 하야 선언을 한 뒤 정계를 은퇴하고 하와이로 건너가 1965년에 생을 마감한다.

원자력 · 경공업 · 중화학 등 산업 전반의 시장경제 초석 다져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자유통상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업적에 대해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용삼 경기콘텐츠 진흥원 감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철도와 비료 철강 등 중화학은 물론 제당 모직 등 경공업육성에도 힘썼다” 며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일지감치 원자력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경제개발, 산업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와 한각의 기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은 유학 과정에서 자신이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는 MIT를 보면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 그는 하와이 교포회관을 매각한 대금으로 ‘한국의 MIT'목표로 설립한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투자하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인, 기업인, 기술자, 외국 유학생 출신 등을 돈암장에 초청해 나라 발전을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을 했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그는 ‘국가발전은 광업에서부터’라는 청사진을 마련해 금과 중석, 석탄을 집중 개발하게 된다.

광업 진흥을 위해서는 험산준령을 넘는 철도 건설이 시급했다. 건국된 지 8개월 만인 1949년 4월 8일, 영주에서 태백 탄전지역인 철암까지 연결하는 영암선 철도건설에 착공했다. 한 달 후인 1949년 5월 3일에는 중앙선 제천역에서 영월발전소를 연결하는 함백선을 착공했다. 영암선은 6.25로 중단되었다가 휴전 후 공사가 재개되어 1955년 12월 31일에, 함백선은 1957년 3월 9일에 완전 개통되었다. 이승만 시절 기본적인 산업철도가 건설되었기에 박정희 대통령 때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산업화 전략이 추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3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4월 4일 내각에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의해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 복구를 위해 연산 5만톤 규모의 평로(구식 용광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원조당국이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에 반대하자 이 대통령은 자체보유불로 공장 건설을 강행했다. 그 결과 서독의 데마그 사가 공사를 수주하여 1956년 하반기 첫 출강식이 거행되었다.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어 1959년부터 철강제품 생산이 개시되었다. 공장 건설과정에서 많은 기술자아 관리자들이 국비로 서독 유학을 가서 신기술을 익혔다. 이들이 바로 박정희 정부에서 포항제철 신화를 일구는 주인공이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공장 건설을 원했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빈곤과 질병의 해소가 목표였다. 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농산물을 제외한 공산품과 비료, 시멘트 등은 일본 제품을 구매하도록 하여 일본의 경제부흥을 유도했다. 일본을 부흥시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공장 건설을 억제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책에 맞서기 위해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건설하거나 유엔한국재건위원회(운크라 · UNKRA)를 설득해 운크라 자금으로 인천에 판유리공장, 문경에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자 미국 정부도 할 수 없이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동의하여 대규모 비료공장 건설을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 시절 산업 각 분야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원자력산업에도 시동을 걸었다. 1956년 2월 우리나라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 협력 협정을 맺었고,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58년 3월에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1959년 1월에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미국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트리가 마크2)를 도입했다.

이승만 정부는 체계적인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립해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들을 마련했다. 이 계획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3개년계획을 완성했으나 국무회의를 통과한 지 4일 후 4.19가 터져 시행되지 못했다.

장면 정부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정되었으나 5.16으로 사장되었다가 박정희 정부 때인 1962년 1월부터 본격 추진된다.

이 뿐만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농지개혁, 교육혁명을 통해 우수 인재 배출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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