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파워인터뷰
조선 오백년 힘,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등용과거 급제한 사람 중에 양반만큼 평민출신 많았다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1.05  11:17:3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조선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파격적인 인재 등용이 많았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 중에 양반만큼 평민출신도 상당히 많았다.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해마다 배출된 문과 급제자는 평균 29명이었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19세기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5백년간 1만4천명 넘는 급제자를 분석했다. 전체 문과 급제자 10명 중 4명꼴인 5천여 명이 중인과 평민 등 낮은 신분 출신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평민이 벼슬길에 오르는 데 큰 장애물이 없었던 셈으로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18세기 중반 정조 이후 평민 출신의 급제자 비율이 크게 상승했고 고종 때에는 60%에 육박했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인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재 추천'에 관한 논의를 폈다. 이익은 올바른 통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은 '올바른 인재 획득'이라는 소신이 투철했던 것이다.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백성이 곤궁한 데서 연유하고, 백성이 곤궁한 것은 관리들이 직분을 다하지 않은 데서 연유하고, 관리들이 직분을 다하지 않은 것은 윗사람이 어진 이를 구하지 않은 데서 연유한다. 임금 된 사람 치고 누가 어진 이를 얻어 일을 맡기려고 하지 않겠는가? (중략) 사람들이 늘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얻기 어렵다고 걱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참소하는 말이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간사한 소인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거나, 임금이 애초 어진 이를 얻지 못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인재 추천 문제에 관한 중국 제(濟)나라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의 사례에서 임금인 환공(桓公)이 관중을 추천한 포숙아를 크게 칭송한 일을 좋은 예로 들었지만 그가 가장 바람직한 사례로 제나라 위왕(威王)을 들었다.

위왕은 좋은 인재를 추천한 즉묵대부(卽墨大夫)에게는 1만 호의 고을을 봉해 주었고, 간신을 추천한 아대부(阿大夫)는 삶아 죽이고 그를 칭찬했던 자까지 삶아 죽였다. 중국의 사서 '통감절요'의 기록이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자신이 추천해 등용된 인재가 나쁜 자로 판명되면 자신을 삶아 죽여도 좋다는 정도의 각오를 가지고 인재를 추천해야 나랏일이 제대로 된다는 소신을 강력하게 피력한 것이다. 이처럼 이익이 강조한 것은 '민생을 살리기 위해서 제대로 된 관리를 등용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분추경리(奔趨競利)는 '분주히 권세가를 쫓아다니며 이익을 다툰다'는 의미

지금도 인사청탁의 문제는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인사청탁은 현재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서도 '분경(奔競)이라는 인사 청탁 분제가 많았다. 분경이라는 말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분주히 권세가를 쫓아다니며 이익을 다툰다'는 의미다. 분경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행이었다. 태조실록의 총서에는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다"고 하여 조선 건국 후 분경의 관행을 상당 부분 없앴음을 서술하고 있다.

1470년(성종1년)에 분경을 금지대상으로 확정해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규정됐다. 이처럼 헌법에까지 분경조항을 구체적으로 둔 것은 그만큼 분경을 철저히 금해야 하겠다는 조선 왕조의 의지였다.

권세가의 입에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사람은 곤장 100대, 유배 3천리에 처한다고 하여 분경하는 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 규정을 정했다. 권세 가문에 드나들면서 정치적 로비를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조선은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운영, 인재육성에 매진서울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중 '독서당길'이 있다. '독서당'은 조선시대 똑똑한 청년 관료들을 따로 뽑아 오로지 책만 읽게 한 것에서 유래됐다. 그 시작은 세종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 8년(1426년) 겨울, 세종대왕은 당시 집현전의 전도유망한 청년 관료 권채, 신석견, 남수문 등 3명을 친히 불렀다.

세종은 이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

"내가 너희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을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成果)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1426년) 12월 11일

이것이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시작이었다. 인사가 만사라는 생각에 당장 인재를 끌어와 쓰기보다는 잘 키워 훗날 더 크게 쓰자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책을 읽도록 휴가를 줬더니 주변 사람들이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가독서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물었더니 "집에 있으니 사람들이 찾아와 독서를 방해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세종은 2차로 사가독서를 가게 된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등에게 집 대신 절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유교국가 조선에서 유학자들을 절로 들여보내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자 빈 사찰을 고쳐 독서당(讀書堂)이라는 국가연구기관을 세우게 됐다.

이처럼 조선에서 사가독서제를 운영했던 이유는 점고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 인재를 잘 키워서 좀 더 큰일을 시켜야 한다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재를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독서당에 보낸 관료들에게 예전 부서의 상사들이 찾아가 업무문의를 하는 것을 금지하는 중종의 당부가 기록돼 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책을 읽고 연구에 힘쓰라고 보낸 것은 훗날 크게 쓰기 위함이었다. 당장의 곤란함 때문에 이들의 독서를 방해하는 건 나라의 폐단이라 말한 것이다.

인재를 발굴하는 것만큼 그 인재를 제대로 키우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인재육성의 기본이 되는 것이 '독서'라는 걸 인식한 조선. 조선왕조 5백 년의 힘은 이런 기본을 잊지 않은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지난해 10월 16일부터 올 1월15일까지 지하 1층 전시실에서 특별전시회 '귀한 나무처럼, 어린 싹처럼-조선시대 인재양성'을 열었다. 이 특별전은 조선시대 교육의 인재양성에 관한 내용을 담은 자료들이 전시된다. 특히 정조가 직접 출제한 시험 문제인 책문(策文) 중 하나로서 세로 110cm, rkfh 420cm나 될 정도로 매우 큰 문서인 '전책제초(殿策題草)' 등을 비롯해 △동학겸교수선생안(東學兼敎授先生案) △임헌공령(臨軒功令) △김조순(金祖淳)의 어고시권(御考試券) 등 조선 왕조의 인재 양성의 의지가 담긴 다양한 자료들이 공개된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오늘의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국회 개원 이후 최초 원가검증기구 운영한다
2
완도군, 4개 권역 352억 투입 어촌 성장 이끈다
3
맑은 하늘이지만 황사 영향, 큰 일교차 주의해야
4
산자중기소위, 코로나 피해 지원 위한 추경예산 수정의결
5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 후보 적합도 39.1% 단연 1위
6
박영선·오세훈, 'MB아바타'·'독재자 아바타' 설전
7
박병석 국회의장, 낸시 펠로시 미국 연방 하원의장과 첫 화상회담
8
[국회] 임신 중인 근로자도 육아휴직 가능해진다
9
매년 4월 12일, ‘도서관의 날’로 정한다
10
국회 정무위원회, 안정적인 서민금융 재원 확보 방안 마련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513) 서울특별시 금천구 벚꽃로234 | 대표전화 : 02)702-0111 | 팩스 : 070-4275-1429
잡지사업등록번호 : 서울중, 라00675 | 등록일 : 1982년 12월 23일 | 인터넷신문사업등록번호 : 서울 아03244
회장: 임윤식 | 사장: 정희돈 | 편집국장 : 정재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형
Copyright © 2013 오늘의한국.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