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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을 배우다-(1)조선에 ‘르네상스 시대’ 열려 했던 실학자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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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08  11:2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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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면 동양에는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이 있다. 다산은 성리학에서부터 철학, 역학, 역사, 경제학, 건축가, 토목, 지리 등 전분야에 걸쳐서 뛰어난 학자였다.

丁若鏞 1762년(영조 38년)~1836(헌종 2)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 마재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집에서 처음 부른 이름은 귀농이었는데 이는 부친이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와 낳은 아들이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성장하여 정약용의 호는 다산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마현리가 어린 귀농(정약용)의 마음을 가꾸어준 고향이었다.

정약용이 자란 마현리 마을 앞에는 큰 강이 흘렀는데 이 강이 바로 한강이었다. 마을의 동쪽에 있었던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합쳐지고 이 합쳐진 물줄기는 마재 마을을 감싸고 휘돌아 서쪽에 있는 팔당을 거쳐 한양으로 흘러갔다. 강은 매우 컸으며, 넓은 모래밭과 긴 강줄기가 마을과 산을 휘돌아 흘러갔다.

그러나 마재는 농토가 부족해 농업이 적합하지 않는 땅이었다. 대신에 뱃길을 이용한 상품들이 드나들었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울로 가는 상품들이 거쳐 지나가는 중간 집산지로 발달한다. 이러한 환경이 후에 정약용이 경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경제유표>를 집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정약용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일골 살이 되자 제법 한문으로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강에서 모래 장난을 하던 정약용은 아버지가 손님들과 시회를 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집으로 달려오게 되는데 정약용은 금방 어른들이 시를 짓고 있던 벼루 가장자리에 둔 붓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가상하게 여긴 한 선비가 약용에게 우리들도 시회를 열고 있었으니 여기서 시한 수 지어보라 하고 말하니 그는 서슴없이 종이를 끌어당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가 이러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小山蔽大山), 거리의 멀고 가까운 이치로다(遠近地不同).” 이 시를 지은 것이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였는데 보고 있던 모두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그날부터 정약용은 더욱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때로는 마을 앞 강가에 나가 자기가 읽은 글을 큰 소리로 외워 보기도 하였다.

정약용이 아홉 살 되던 해 가을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 생각이 날 때면 그는 말없이 시를 지었는데 열 살이 되자 꽤 많은 시가 모였다.

아버지께서 약용이 지은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이름을 지으려 하였다. 큰 아들 약현이 '삼미집'이라고 하자고 하였다. 약용은 천연두를 앓아 눈썹이 몇 개 없는 것처럼 보여, 눈썹이 세 개밖에 없다는 뜻으로 '삼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미집'을 읽어 본 사람들은 조선에도 중국의 두보나 이태백만큼 훌륭한 시인이 나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약용이 열두살 되던 해에 아버지 정재원은 5남매 자식들을 위해 동지중추부사 김의택(金宜澤)의 서녀인 스무살 김씨를 측실로 삼았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 말수가 적었지만 영민하고 천성이 온화해 아이들에게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을 쏟으며 보살폈고 그 덕분에 정약용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유난히 책읽기를 좋아하던 정약용은 외할머니 댁으로 책을 빌리러 다니곤 했다. 외가는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며 시인이었던 윤선도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책이 많았다. 어느 날 정약용은 읽은 책을 나귀 등에 싣고 외가에 돌려주러 가는 길에 포천에 사는 이서구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서구는 당시 시에 능했던 이덕무·유득공·박제가와 함께 4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소완정으로 벼슬은 사관을 거쳐 호조 판서, 대제학, 우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다.

   
 
민란 일으키고 도주했던 이계심이 정약용 앞에 나타난 이유는?

며칠 전에도 책을 나귀에 싣고 갔는데, 책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이서구가 정약용을 불렀다. 이서구는 책 몇 권을 빼서 내용을 이것저것 물어 보았는데 정약용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결혼을 일찍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정약용도 열다섯 살에 장가를 가게 된다. 22살 되던 해에 성균관으로 들어가 정조와 인연을 맺게 된다. 어느 날 정조가 성균관 학생들에게 문제를 냈다. 정조는 정약용의 답안을 본 후 그의 뛰어난 능력을 간파하고 중히 여겨 높은 관직을 두루 맡게 했다.

암행어사로 활동할 때는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로 처참한 생활을 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직접 확인했으며 황해도 곡산에서 목민관을 역임했을 때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이때의 경험들은 ‘목민심서’의 바탕이 됐다.

당시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부임하는 날. 한 남자가 그의 길을 가로 막았다. 이계심(李啓心)이었다. 전임 수령에게 1000여명의 주민을 이끌고 항의하다 관군을 피해 산으로 도망간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조정에서는 민란을 일으키고 산으로 도주한 이계심을 잡기 위해 훈련도감을 포함한 오군영의 군사들까지 파견했지만 번번이 그를 잡는 데 실패했다.

그랬던 그가 제 발로 정약용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정약용은 관아로 데려가 갑자기 나타난 연유를 물었다. 이계심은 정약용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낱낱이 적은 12조목을 건넸다. 거기에는 정약용 부임 직전 서리들이 포보포(砲保布 ‧ 포군에게 내는 군포)대금으로 200전을 걷어야 하는데 백성들에게 무려 900전이나 걷어 뒤로 빼돌린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이어졌고 이계심이 우두머리가 돼 1000여명을 모아 관에서 호소한 것인데, 오히려 죄인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여러 정황을 파악한 수 이계심을 무죄 방면했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

이계심의 무죄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반겼지만, 조정에서는 수령의 권위를 붕괴시켰다고 그를 파직해야 한다는 정쟁이 일었다. 하지만 정조는 정약용을 칭찬하자 정쟁은 일단락됐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받던 정약용은 정치와 경제의 부조리를 타파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서 조선후기의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고자 했다. 서학연구와 과학 ·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던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인원과 비용을 절감한 거중기를 고안했으며, 정조가 모후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으로 행차를 할 때 쓰인 배다리도 설계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학문연구에 몰두

이후 조정에서 권력을 잡은 세력이 반대파를 내치기 위해 조선의 유교 이념과 많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1801년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신유박해라고 하며 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했다. 정약용 역시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만 했고 이곳에서 18년 동안 고립되어 혼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정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아암 스님으로부터 다도를 배워, 다산이라는 호가 생겼으며 초의 스님이나 추사 김정희 등과도 서신왕래를 하는 등의 교류를 했다. 주요 서술서로는 여유당전서 500여권에 포함되어 있는 사서 육경에 관한 저작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마과회통, 아방경역고, 아언각비, 아학편 등이 있다. 현재 500여권의 전서 중 연구,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그 반 정도이다.

그의 나이 쉰일곱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이후, 고향 경기도 양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남은 여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고단한 귀양살이 중에도 학연 학유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내용의 저서를 남겨야 하는지 가르쳤다.

삶의 깊고 넓은 원리를 터득한 다산의 편지에 두 아들은 감동해 독서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몇 대째 내려오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 훌륭한 학자이자 문장가로 성장하게 된다.

정약용의 대표작은 1표2서(一表二書)라 하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말한다. 경제유표는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조정하여 정치 사회 경제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또한 목민심서는 공직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지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외국에도 알려져 베트남의 최고 지도자인 호치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항상 곁에 두고 국정에 반영했다고 전해진다. 정약용을 사랑한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로 존경받는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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