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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지명이야기땅이름에 역사가 흐르고 전설이 스며 있다
주엽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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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13  13: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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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은 땅이름이다. 사람에게 인명이 있듯이 땅에도 지명이 있다. 지명은 단순한 이름이라고 하기보다는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또 다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둘러싼 지리적, 역사적, 민속학적, 유전자적 특성과 흔적이 지명 속에는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따라서 오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질과 산업, 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유적, 제도와 인물 등 지명에는 전설이 얽혀있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지명이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었거나 멸실됐다. 일제강점기에 단군 이래 5000년의 역사를 담고 이어온 우리나라의 지명의 역사를 갈아엎었다. 이는 지명에 담긴 사람과 자연의 역사를 짓밟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명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적 가치이다.

   
 
중랑구 묵동

묵동(墨洞)은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해진다. 과거에 먹을 제조하였기 붙여졌다는 설과 문방사우 중에 하나인 먹을 마을 이름으로 붙여야 마을의 학문이 발달한다고 하는 비기설에 의해 이름 붙였다는 설이다.

노원구 월계동은 예전 마을 가운데 있던 연못의 모양이 마치 연적(硯滴)과 같아 연촌 또는 벼루말이라고 했다. 성북역은 이전에는 연촌역이라고 불렸으며 하계동은 필동 또는 붓골이라고 불렀다. 월계동, 하계동, 묵동을 연결하면 삼각형이 되는데 이 안에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삼각형 내인 공릉동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서울대학교 이과대학의 전신)가 세워져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자 일대 주민들은 이곳 동명을 묵동이라 정했기 때문에 교육촌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묵동의 명물로 먹골배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에 대항하여 단종 복위운동을 꾀한 사육신은 처형당하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때 호송을 책임졌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목적지까지 가슴 졸이며 호송한 후 서울로 돌아와 관직을 그만두고 봉화산 아래 중량천가에 자리를 잡아 필묵과 벗하며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배나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유배지를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 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그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나무에서 수확한 배를 올리고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왕방연의 무덤은 후손에 의해 이장되었으나 그가 심었다던 배나무만 자라 사방으로 번식하여 이 일대가 배밭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이다. 먹골배는 달고 맛이 유달리 좋은 배의 대명사처럼 쓰였는데 이는 왕방연의 눈물과 정성이 그가 가꾼 배에 스며들어 혀끝에 여운이 남으면서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은평구 불광동

불광동(佛光洞) 근처에는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 중 부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한데서 유래되었으며 이곳은 조선왕조 때 한성부 관할구역이다. 지금도 북한산 자락인 불광동 인근에는 여러 개의 사찰이 있다. 수리봉 산 밑에는 산돼지가 많이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저서현이라는 고개와 관동(館洞)이 있다. 관동은 현재 은평구 불광2동 아미산 기슭에 있던 동네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숙종의 계비였던 장희빈이 태어났다.

미복차림으로 서오릉의 선왕 참배 길에 올랐던 숙종이 빨래하던 처녀에게 마실 물을 청해서 마셨다고 전해진다. 숙종이 관동 우물에서 물을 마셨다 하여 어수정(御水井)이라 전해진다. 장희빈이 입궁한 뒤로부터 이곳에 관가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여 관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졌다고 한다.

특히 장희빈의 당숙인 장현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던 인물이다. 수많은 관리들이 벼슬을 사려고 장현의 집을 드나들었는데 그 고개를 관터고개라고 한다. 관터고개는 지금의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연신내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를 말한다.

그 시절에 “관터고개를 넘었느냐?”는 물음은 세력가와 손이 닿았느냐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한편 불광동 독박골에는 1623년 인조반정 당시 큰 공을 세운 원두표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인조반정 직전, 지금의 불광동 일대의 바위굴 근처에서 낯선 젊은이가 다니곤 했다. 동네 사람들이 “당신은 무엇하러 온 사람이오?” 물으면 젊은이는 “나는 염병이 걸려 공기좋은 물 좋은 곳으로 병을 고치러 왔소.”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젊은이가 원두표 장군이었다. 당시 인조반정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제 병 고치러 가세.”라는 말로 거사의 암호를 대신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반정이 성공한 뒤 인조는 원두표 장군이 으거했던 바위골을 ‘덕이 있는 바위골’이라는 뜻에서 덕바위골이라고 부르게 됐다.

   
 
은평구 연신내

옛날 이곳은 산골이었지만 한성부의 관할구역으로서 연서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연서역은 조선초에 영서역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 반정 때 상단부사 이서가 이곳에 늦게 합류했다 하여 영서역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선조에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쓰면서 중국에서 명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대결이 시작되자 국익을 우선해 실리외교를 펼치게 된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비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혈통상으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에 비해 불리한 위치였다. 게다가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중립외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을 도왔기 때문에 성리학자들의 명분론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광해군을 지원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던 북인들은 학문적으로 정통성에 있어서 퇴계 이황의 문인들로 이루어진 남인이나 율곡 이이의 문인들로 구성된 서인에 비해 취약했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의 주장에 따라 남인들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 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했다.

그러자 남인뿐만 아니라 서인까지도 광해군과 북인 정권에 등을 돌리게 했다. 광해군은 이복동생이 영창 대군을 왕으로 옹립할 것을 두려워 살해하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여 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부르게 했다.

이에 성리학자들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패륜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서인들에게 반정의 구실을 제공했다.

능양군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이곳 별서에 머물며 겉으로는 허송세월하는 척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귀 등의 거병이 있자 친병을 거느리고 연서역으로 가서 장단 부사 이서의 병사 7백여 명을 맞이하여 도합 1천4백여 명의 반정군을 모으게 되었다.

이때 이서가 약속한 시간에 홍제원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능양군은 몸소 연서역까지 나와 이서를 기다렸다. 이 때문에 뒷날 이곳을 이서가 지각한 곳이라는 뜻에서 연서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정에 성공한 후 왕위에 오른 능양군이 바로 인조이다.

   
 
중구 신당동

신당동은 중구에서 타워 호텔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기 전 버티고갯 길 쪽에 해당하며 이곳에는 광희문(光熙門)이 있다. 많은 무당들이 모여 무당촌을 이루었으므로 신당(神堂)이라 불러졌다고 한다. 갑오개혁을 거치고 신당리(新堂里)로 관할이 바뀌었으며 이때부터 ‘귀신 신(神)’자가 ‘새 신(新)자로 기록된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죽은 시신을 밖으로 내보내는 출구로 사용되어 시구문(屍口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던 광희문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염병 질환을 주로 구호하던 의료기관인 동활인서도 이곳에 있었다.

1392년(태조 1)에 대비원(大悲院)으로, 1414년(태종 14)에는 활인원(活人院)으로, 1466년(세조 12)에는 활인서(活人署)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882년(고종 19)에 혜민서(惠民署)에 통합된다. 그 후 서양 선교사에 의해 제중원(濟衆院)으로 변경되었는 데 이것이 오늘날 대한 적십자 병원의 전신이다.

또 약수동과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버티고개라고 한다. 조선시대 때 도성 서쪽의 무악재, 남쪽의 남태령 못지않게 고개가 높고 험해서 낮에도 고개를 넘는 행인들 앞에 도적들이 출몰하곤 했다. 이 때문에 포졸들이 순찰하면서 “번도, 번도”하고 외치면서 도적들을 쫓았다고 하여 번티, 버티, 부어치(扶於峙) 등으로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신당동이 떡볶이 골목으로 유명하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역사는 50년대부터 시작됐다. 1953년부터 떡볶이를 팔고 있는 마복림 떡볶이가 바로 원조다.

1990년대 중반 TV광고에서 “우리 떡볶이 고추장 맛의 비결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대사로 유명해진 고 마복림 할머니가 처음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6.25전쟁 직후 중국음식점에 갔다가 가래떡을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떨어뜨렸는데, 그 떡을 먹고 보니 맛이 좋아 고추장에 춘장을 섞어 팔기 시작한 것이 원조가 됐다.

70년대 골목길 양쪽으로 여러 떡볶이 가게들이 잇따라 문을 열면서 오늘날의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생겨나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 이곳 가게들은 DJ를 기용해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당시 DJ박스 안에서 손님들이 건넨 사연 적힌 쪽지를 읽으며 음악을 틀어줬던 DJ들에게 여고생들은 열광했다.

따라서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서 마복림 할머니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헤리케인 박’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박찬영씨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떡볶이 집에서 DJ로 일했던 그는 어느 새 50세가 넘은 중년아저씨가 됐고 지금도 여전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DJ박스를 지키고 있다.

주엽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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