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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500년이나 갔을까?왕정이지만 정책시행하려면 신하들과 조정회의 거쳐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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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13  11: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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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국민투표 한 세종, 조세제도 개혁 13년 만에 공포

50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나라를 빼앗긴 후 해방이 되자 외래이념들로 넘쳐나고 나라가 분단하는 불운을 겪었다. 사회는 도덕이 추락하고 분열되어 좌파와 우파, 지역과 지역,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내편과 네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탓하고 적대시하게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우리만의 고유한 기품 있는 철학과 정신을 잃어버리고 얼이 빠져 과거 위대했던 역사마저도 부정한다.

또 역사의식도 소명의식도 없고 주의의식도 책임감도 없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오로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익을 위한 싸움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에 본지는 조선의 역사를 다루면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역사관이라고 한다. 역사관은 사람마다 다르고 다양한 사각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동안 조선시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폄하해온 경향이 있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고 하면서 조선이 망한 이유로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을 달달 외우게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500년 만에 망한 민족으로 조선역사를 부끄럽게 만들고 심지어는 참담한 심정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것은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된 것은 1910년이다. 조선시대의 역사는 정확히 518년이 된다.

하지만 전 세계 역사에서 500년 이상 간 다른 나라 왕조는 없다. 서구에서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 오스만투르크가 600년 동안 유지됐는데 이들 나라들은 왕조가 아니라 제국이었다.

전 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이처럼 오랜 시간 지속된 것은 조선 이외에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700년, 백제 700년, 고려 500년, 통일신라 1000년이 된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이처럼 오랜 기간 유지가 됐다. 그렇다면 왜 그럴 수 있을까? 한 왕조가 오래 유지되려면 정치적인 합리성과 경제적 합리성 그리고 조세 정의가 실현되고 공정한 법제도, 문화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관들 쫓아다니며 왕의 일거수일투족 기록

조선은 왕정국가였지만 왕이 정책을 시행하려면 신하들과 치열한 토론을 거쳐야 했으며 국왕에게는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사간이 따라다니면서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에게는 귀중한 사료이다. 실록의 기록은 사관이 기록해 놓은 사초를 기초로 작성된다. 사초는 8명의 사관이 숙직을 하며 사관은 왕이 참석하는 모든 회의에 참석하여 임금의 언동 등을 빠짐없이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화장실 가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적을 정도였다. 그리고 공식 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다. 이에 인조는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쫓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어느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다른 방으로 오라’고 해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사관이 인조를 찾다가 그 방으로 지필묵을 싸들고 들어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물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적었다.

인조는 그 사관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적었다.

태종은 다른 왕에 비하여 유달리 사냥을 좋아하여 재위기간동안 많은 사냥을 나갔다. 조선시대 국왕의 사냥은 놀이의 한 형태가 아니었다. 국왕의 사냥을 강무講武라고 불렀는데 일종의 군사훈련으로 대규모 몰이꾼을 동원하여 사냥형태를 띈 일종의 군사훈련 하는 형식이다. 태종실록 태종4년(1404년) 2월8일자 기록을 보면 태종이 강무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태종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이때 태종은 주위의 돌아보며 신하들에게 한마디 한다.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그 한마디는 당황한 태종이 사관史官에게 자신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국왕인 태종이 사냥 중 말에서 떨어졌다는 기록이 실록에 기록될 경우 후대에 그 기록을 보게 되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님을 염두해 두고 주변에 있던 신하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하지만 사관은 태종이 주위의 신하에게 당부한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한 말까지 그대로 썼다.

태종에게 박은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박은은 오랫동안 태종을 보좌해서 눈치가 바르고 태종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종이 평강으로 사냥을 떠나려고 단단히 결심을 하고 신하들과 의논을 했다. 이때 좌의정 박은은 찬성하고 영의정 유정현은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사냥을 나가시면 백성들의 민폐가 심할 것이옵니다”

태종이 두 사람의 대답을 듣더니 정색을 하고

“영의정의 의견에 나는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좌의정의 말도 설마 아첨하려고 한 말이야 하겠는가?”말했다.

사관의 신분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다. 오늘 날과 비유했을 때 공무원의 사무관정도라고 할 수 있다. 사관이 이렇게 왕을 따라 다니며 사사건건 다 적은 후 그날 저녁 집에서 정서를 했다. 이걸 사초라고 한다. 왕이 죽으면 이 사초를 토대로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신록편찬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서는 그것도 500년간 기록은 전 세계에서도 조선이 유일하다. 분량만도 6,400만자로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본다면 11.2년 걸린다.

현재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왕은 절대로 사초를 볼 수 없다

실록과 사초는 왕이 볼 수 없었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역사를 바르게 써서 교훈을 얻고 그것을 통해 뒷날의 잘못을 경계하려는 생각, 곧 ‘감계(鑑戒)’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공정한 역사 기록은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당대 역사 기록인 사초는 왕도 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사초를 본 사람은 당태종이다. 재상 방현령은 당태종의 협박에 굴복해 급히 사초를 듣어고쳐 <실록>이라고 가제본해 바쳤다. 이 같은 당태종의 권력 행사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당태종도 사초를 보지 않았느냐”며 사초를 보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사관들이 이에 굴하지 않았다. 사관 신개는 당태종의 고집 때문에 방현령도 사초를 고쳐 썼다는 점과 역사에서 교훈을 얻겠다면 다른 책들도 많다, 사관 수십명이 기록하므로 제대로 쓰는지 보겠다는 것은 이유가 못된다, 사초를 열람한다면 왕에게는 좋은 기록이 남더라도 후대인들이 공정성을 의심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논박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실록>을 발리 편찬하라고 재촉했지만 사관들은 객관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3대 뒤에 편찬해야 한다고 맞섰다. 태종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관들만 골라 실록을 완성했지만 그 기록을 보지 못했다.

1431년 3월2일 세종은 아버지 태종을 사관들이 어떻게 기록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선왕에 대한 기록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맹사성이 반대하고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더라도 이를 고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만일 전하께서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도 이를 본받아 고칠 것이고, 사관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식하여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을 전하겠습니까?”

세종은 물러섰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7년 후인

1438년 3월 2일 세종은 또다시 실록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는 황희와 신개가 나서 “만약 사기를 보는 게 자손으로 전해지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두호(斗護)할 것이니 천년 후에 무엇을 믿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하께서도 보지 마시고 조선왕들이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말했다.

세종은 조선의 왕은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리게 된다.

이 외에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일성록(日省錄)이 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왕에게 올릴 보고서, 전날 받은 하면서, 또 왕에게 할 말' 등을 매일매일 회의를 했다. 이 일지를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일성록(日省錄)은 날 日자, 반성할 省자로 왕들의 일기이다. 정조가 세자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 쓰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대를 이어서 조선이 망하는 1910년까지 쓴 왕들의 일기이다.

특히 정조는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등을 조목조목 나눠서 썼다. 이처럼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단 한 나라도 없다. 따라서 조선은 말 그대로 기록문화로 인류역사에 빛나는 유산이다.

   
 
세종,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그러나 조정회의에서 부결

세종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민투표를 실시토록 한 임금이다. 세종이 집권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고려말에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 개정이 안 되어서 였다. 세종은 개정안을 만들어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세종12년 3월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된다. 이유는 수정안이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을 틀림이 없지만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들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했다. 그래서 세종12년 8월에 5개울에 걸쳐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왔다. 찬성이 훨씬 많게 나왔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된다.

이유는 찬성이 물론 많지만 반대도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러면 농민들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고 명해서 안이 완성됐다. 하지만 실시하려고 하자 이 안이 부결됐다. 이유는 농민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아직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의한 것이 '조그만 지역에 시범실시'를 하게 된다.

시범실시를 3년 정도 하자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전국에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그마저도 부결된다.

"전하,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봐야 된다는 것이다. 세종은 토질이 다른 지역에 시범실시를 하게 된다. 결과 성공적이었다. 그럼에도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조정회의를 열었지만 또 부결된다.

"전하,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토론했사옵니다. 하지만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있을 지를 토론한 적이 없사옵니다."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된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해서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해서 13년 만에 공포시행했다.

 

차별이 없어야 하고 경제적인 여유와 서로 배려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 왕

이처럼 세종은 이 나라 백성들에게 희망과 열정, 사랑과 배려의 미덕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임금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차별이 없어야 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서로 배려할 줄 알아야 하며, 무병장수의 꿈이 현실로 다가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초정리 주변 마을의 노인들을 불러 양로연을 베풀고 90세 이상 노인은 관직을 제수했다. 토지 1결당 쌀 생산량을 최고 4배까지 증가시켰으며 경작지를 두 배 이상 확대시키는 등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데도 힘썼다.

이와 함께 의녀제도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관청의 여자 노비가 아이를 낳게 되면 7일간 출산휴가를 주던 것을 100일로 늘렸으며, 남편에게도 한 달간 산후 휴가를 주도록 했고, 어린 아이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재생원을 개선하고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죽지 않도록 특별지시를 내렸다. 감옥은 죄를 다스리는 곳이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키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청주향교에 책을 아홉 권 하사했다. 청주향교는 그날 이후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대마도 사신이 세종을 만나러 청주읍까지 왔고, 세종은 대신들과 함께 이곳에서 외교행정을 펼쳤다.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의 신미대사와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인에게 술과 음식을 먹이고 면포 1필을 하사했으며, 충청도 병사들이 초정행궁 경호를 맡았는데 필수요원만 빼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일을 돕도록 하는 등 어짊을 실천했다.

세종이 재위한 시대는 당대와 후손에게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 만년 운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와 함께 현대에 와서는 한국의 지도자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시대의 화두인 창조경제, 문화융성, 국민행복을 실천한 글로벌 리더였던 것이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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