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신분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 사회적인 욕구나 자아실현의 욕구 등 이차적인 욕구 이전에 기본적으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일차적인 욕구로는 식욕과 수면욕, 성욕 등이 있다.

그 중 성욕은 종족보존을 위한 생물학적인 본능 외에 사랑이라는 내밀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삶을 윤택하게 하는 문화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학습 효과에 의해 문화적으로 승화해낼 수 있는 욕구이기에 성욕은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는 대상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의식이 혼인이다.

요즈음 결혼이라 하는 의례를 조상들은 혼인이라 했다. 일제 강점기에 신식 결혼문화와 더불어 결혼으로 용어가 바뀌었으나 아직도 ‘혼인신고’와 같은 고유 용어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 혼인은 신랑과 신부가 동등한 자격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 의식인데 비해 결혼식은 남자를 주인공으로 전제한 용어다. 혼(婚)은 ‘장가가다’ 는 뜻의 신랑중심용어, 인(姻)은 ‘시집가다’를 뜻하는 신부 중심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 단종비 송씨 정순왕후묘 사릉

문화적으로는 혼(婚)은 황혼녘에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예식을 올리기 때문에 계집 녀(女)변에 황혼 혼(昏)자를 합하여 신랑과 관련된 혼(婚)자를 형성(形成)했고, 인(姻)은 여성 중매인을 매개로 남자와 인연을 맺은 것에 착안, 女에 인연 인(因)을 합한 형성문자로 신부에 관련한 용어를 창안해 냈다. 이 문자를 통해 혼인의 풍습과 사회적 관습을 읽을 수 있다. 요즈음 성행하는 결혼상담소가 남자보다 여성의 직종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예전의 매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인은 그렇게 매파가 맺어준 인연으로 저녁에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데 비해 조선 왕실에는 어떤 절차를 밟아 혼례를 올렸을까?

“세자가 전 총제 김한로의 집에 친영(親迎)하였다. 임금이 비가 왔으므로 임시로 *임헌초계(臨軒醮戒임금이 왕세자에게 배필을 맞아들여 종사를 계승하고, 궁인을 다스리라고 이르는 의식)를 면제하였다. 을시(乙時)에 세자가 공복(公服) 차림으로 연(輦)을 타고, 내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연에서 내려 악차(幄次*임시로 만든 막차)에 들어갔다가, 정시(丁時)에 빈(嬪)을 맞아 돌아왔다. -1407년(태종7년) 7월 13일

친영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육례(六禮)의 하나다. 조선 초기에는 아직 간택과 같은 제도가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태종이 사위를 삼고자 한 집안에 소식을 넣었는데 거절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금혼령을 내려 간택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태종실록에는 세자빈을 맞기 위한 금혼령과 민초들의 흉흉한 반응이 처음 나타난다.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간택제는 태종 때 처음 실시했다는 주장의 근거다.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여 동녀(童女)를 채집하고, 중외(中外)의 혼가(婚嫁)를 금하였다. 의정부찬성사 남재, 참지의정부사 함부림, 한성 윤 맹사성으로 제조를 삼고, 경차관(敬差官)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처녀를 선택하게 하였는데, 공사(公私) 천례(賤隷)는 제외하고 양가의 처녀 13세 이상 25세 이하를 모두 선취(選取)하게 하였다. 조금 뒤에 전지(傳旨)를 내려 노비가 없는 양반과 서인의 딸은 일체 쇄출(刷出)하지 말게 하였다. 조금 뒤에 또 경차 내관(敬差內官)을 각도에 보내 간택하니, 중외가 흉흉(洶洶)하게 소동하여 몰래 서로 혼인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후략)” -1408년(태종 8년) 4월 16일

이렇게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선발해 온 처자는 20명~30명 정도였다. 태종실록 1408년 6월 3일조에는 간택에 대한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경상도에서 6인, 전라도에서 4인, 충청도에서 3인, 개성 유후사에서 12인, 경기좌·우도에서 4인, 풍해도에서 1인’ 등 모두 30 명이었다. 의정부에서는 그 중에서 7명을 간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 7명을 대상으로 다시 3명을 재간택하여 올리면 최종적으로 임금이 낙점하여 세자비(왕비)가 되고 나머지 두 명은 대부분 후궁이 되었다.

후속의 기사에는 부모의 3년상을 입었거나 독녀(獨女)로서 형제가 없는 자는 모두 방환(放還)하였다고 했다. 마치 큰 혜택이라도 베푼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즉 간택에서 떨어진 처자는 혼인을 할 수 없고 일부는 명나라 황제의 공녀로 차출되었다. 그래서 ‘중외가 흉흉(洶洶)하게 소동하여 몰래 서로 혼인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했다.

조선 초기 명나라 사신 중에 조선출신이라고도 하는 황엄이 있었다. 그는 오만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 태종이나 세종도 큰 절을 하며 황제의 칙령을 받아야 할 만큼 황제의 위의를 업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 자는 조선에 올 때마다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에게 바칠 공녀와 환관을 데려 갔다. 간택에 오르면 생이별을 해야 하는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딸을 가진 부모는 일찍 혼인을 시켜 조혼풍습이 만연했다. 간택단자를 올리는 폐단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왕실과 혼인을 맺으면 권력의 핵심에 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백성들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긴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태종의 무서운 칼날에 왕비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남은 물론 아들 세종의 장인과 처남을 도륙하고 장모는 관비로 보내는 등 태종의 무자비한 권력은 왕실과 멀리하는 것이 편히 사는 방법이라는 깨달음의 반면교사였다.

무서운 칼날이 잠잠해질 무렵 수양대군은 또 다시 피바람을 일으켜 단종비 정순왕후가 18세의 어린 나이에 생과부가 되어 82세까지 한 많은 삶을 누린 모습을 보았다. 정순왕후 송씨는 송현수의 딸로서 15세에 간택된 지 20일 만에 한 살 어린 세자와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화려한 궁중 생활도 잠시, 숙부에게 양위하고 난 후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되자 친정집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왕실과 인척을 맺은 집안의 비참한 최후를 본 민초들은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뜨거운 감자였다. 비극은 끊이지 않았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영창대군은 반역죄로 몰려 강화도에서 증살(蒸殺)당하고 친정 아버지 김제남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사(1613년)된 후 1616년에 폐모론이 일면서 다시 부관참시 당했다. 그런 험한 꼴을 본 민심이기에 왕실과 인척을 맺는 것은 곧 멸문지화를 당하는 지름길로 여겼다.

혼인길이 막히거나 명나라에 공녀로 떠나야 하는 신세로 전락할 운명의 그네에 딸자식을 태울 사대부는 당쟁에 힘을 얻기 위한 권력추구형 해바리기 외에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간택에 임하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 데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이 있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새 옷을 구할 수 없어 언니의 옷을 손질하여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궁궐에 갔더니 영조를 비롯한 왕실의 어른들이 무척 귀여워하여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형식은 그랬다. 왕비의 간택은 전국에서 인물을 고른다는 명목으로 금혼령까지 내리는 호들갑을 떨었으나 정작 궁실 내부에서는 명문가 집안과 인척을 맺기로 내락된 상태였다. 왕실을 안정적으로 이끌려는 욕심과 새 임금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보장책이 필요했던 까닭에 간택에 참여한 처자의 가문은 들러리 신세나 다름없었다.

왕비의 자격

전술한 대로 왕비는 30여명의 간택 단자에서 7명을 간택하고 그 중에서 3명을 재간택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는 1866년(고종 3년) 2월 25일조의 고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첨정 민치록의 딸, 유학 김우근의 딸, 현령 조면호의 딸, 영 서상조의 딸, 용강 현령 유초환의 딸을 재간택(再揀擇)에 넣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허혼(許婚)하라.’는 내용이다. 결국 재간택은 7명 내외에서 이루어졌고 재간택에 오르지 못한 처자는 혼인을 해도 좋다는 내용이다. 이들이 최종 간택자로 남는 조건은 무엇일까? 왕비의 신체적 조건에는 당시의 미적 기준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다.

▲ 손종비 순정황후

1. 키는 적당히 커야 한다.
2. 코끝이 뾰족하지 않은 둥글어야 한다.
3. 입술은 앵두같이 붉고 얇아야 한다.
4. 가슴이 작아야 한다. 너무 크면 미련하다.
5. 양 미간이 넓어야 한다.
6. 목은 굵지 않아야 한다.
7. 턱은 주걱처럼 넓어야 한다.
8. 피부는 희고 고와야 한다.
9. 눈은 외거풀이고 끝이 내려가야 한다.
10. 엉덩이는 커야 한다.

이 외에 손발의 크기와 모양새, 몸에서 냄새가 나는가의 여부, 훤칠한 앞이마에 ㄷ자를 엎어놓은 듯한 윤곽선(곡선이 아니어야 함), 허리의 굵기 등을 궁녀들이 세세히 관찰 확인했고, 대비와 왕실의 어른들은 음식을 먹는 자태와 습관도 자세히 지켜보았다. 전체적으로는 13세 이상 15세 이하여야 하며 그런 조건을 갖춘 처자 중에서 되도록이면 세자보다 두세 살 위인 처자가 낙점 받을 확률이 높았다. 참고로 1819년(순조 19년) 4월 16일조에는
‘9세부터 13세까지의 처자에게 금혼(禁婚)을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게 간택한 처자는 최종적으로 지혜와 덕성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을 했다. 내명부의 일이니 왕비 선택의 최종심은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결정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영조는 친히 간택에 나섰다. 그 장면은 66세의 영조가 간택의 종심에 오른 세 처자와 주고받은 심문에 잘 나타나는데 그 중 김한구의 딸 김처자와의 대화가 으뜸이다.

첫 번째, 세 처자에게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에 앉으라 했다. 그랬더니 두 아가씨는 냉큼 방석에 앉는데 김처자는 그 옆에 조아리고 서 있었다. 왜 앉지 않느냐고 했더니 어떻게 아버지 이름을 깔고 앉느냐며 이대로 서있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두 번째, 세상에서 어떤 고개가 제일 높으냐고 물었다. 두 처자는 대관령, 추풍령이라 했지만 김처자는 보릿고개라 했다. 그 d ldb를 물으니 세상살이 어려울 때는 보릿고개 넘기가 제일 어렵다고 했다.

세 번째, 세상의 꽃 중에서 어느 꽃이 가장 아름다운가 물었다. 두 처자는 목련꽃과 연꽃이라 대답했으나 김처자는 목화라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다른 꽃은 시들면 그만인데 목화는 추울 때 백성을 따듯하게 보호해 주니 아름답다는 것이다.

야사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지붕의 기왓골이 몇인지 물으니 다른 처자는 나가서 일일이 지붕의 골을 세어보고 답했으나 김처자는 그 자리에 앉아서 낙숫물 자국을 보고 답했다는 것이나,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정이라고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는 것을 보면 정순왕후의 비범함을 드러내기 위해 후대에 각색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김한구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경위에서의 역할, 그리고 정조가 죽은 후 정적을 제거하고 천주교를 박해하는 과정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신중하게 선택한 왕비라 해도 언제나 자애롭고 지혜로운 왕비가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은 바둑판과 같은 인생살이의 교훈에도 해당한다.

왕비의 역할

임금이 품계가 없듯 왕비도 품계가 없다. 다만 내명부를 다스리며 왕을 보필한다. 내명부는 『경국대전』에 '내명부'로 명시되어 있는데 내관직과 궁관직으로 나뉜다. 그 중 내관직은 왕의 후궁조직을 말하며 궁관직은 궁녀조직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명부의 수장은 이를 관리 감독하는 왕비다. 내관직은 중전 밑으로 빈(정1품), 귀인(종1품), 소의(정2품), 숙의(종2품), 소용(정3품) 숙용(종3품), 소원(정4품), 숙원(종4품)의 8품계가 있고 궁관직은 정5품 상궁을 기점으로 종9품에 이르기까지 10등급의 품계가 있다.

다만 내관직으로서 후궁은정해진 인원이 없고 왕의 능력이나 성품에 따라 차이가 있다. 태종과 성종은 12명의 후궁을 둔 데 비해 현종은 명성왕후의 등살에 밀려 한 명의 후궁도 두지 못했다.

궁녀는 고종실록의 기록에 대전과 중궁전에 각각 100명, 대비전에 100명, 세자궁에는 60명, 세자빈궁에는 40명, 세손궁에는 50명, 세손빈궁 30명을 두도록 궁녀의 수를 정해놓았다. 숫자로 보면 480명이지만 대략 500명 내외의 궁녀가 궁궐에서 생활하며 왕비의 통솔을 받았다.

외명부는 왕실의 종친, 그리고 문무관의 정실부인에게 남편의 품계에 따라 주어지는 벼슬이다. 공주와 옹주는 품계가 없어 외명부의 최고위 역할을 한다. 신하의 부인으로는 공신이나 정승의 부인인 정경부인(정1품, 종1품)을 비롯하여 정부인(정2품, 종2품), 숙부인(정3품 당상관) 등 종9품에 이르기까지 외명부의 품계를 받은 부인들이 왕비의 통솔을 받는다.

당쟁에 휘말렸던 조선시대의 왕비는 일반적으로 사극에 의해 권력의 방향타 역할을 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세도정치의 그늘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임금에 대한 애틋한 정서는 왕비를 부정적으로 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왕비는 국모로서 왕실의 체통을 지키고 임금의 치국에 전력할 수 있도록 내명부를 다스리며, 왕실 보전을 위해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왕통의 산실이었다.

강기옥  kangko5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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