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공동인증서·생체인증서 등 도입 가속화

한국인처럼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외국인들이 세기의 발명품이라며 입을 모아 극찬하는 우리나라 커피믹스만 봐도 한국인의 급한 성미를 알 수 있다. 한 포장 안에 커피, 프림, 설탕이 모두 들어 있는 커피믹스는 한국식 ‘빨리빨리’ 문화의 산물인 셈.

한국의 인터넷 속도는 평균 28.6Mbps로 149개국 중 1위를 달리고 있고, 최근에는 외출 후 집에 도착해 리모콘을 찾아 헤매는 번거로움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음성인식을 지원하는 인공지능(AI) 스마트홈 서비스가 일반화되고 있다. 그 결과, 집 안에 들어서면서 “에어컨 켜줘” “TV 켜줘” 등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제품들이 속속 출시됐다. 그러나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따라오지 못하고 유독 사용이 복잡한 시스템이 있다. 바로 인터넷뱅킹, 연말정산 등을 포함해많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인인증서다.

고객이 매년 갱신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반드시 동일한 개인 컴퓨터에서만 사용이 이루어져야 하거나 공인인증서가 저장된 USB를 항상 휴대해야 하는 등 수많은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폐지 방침을 밝혔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 중 하나였던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폐지가 올해 안에 이루어지는 것. 이로 인해 블록체인이나 생체인증 등의 새로운 인증 수단이 확산되고 있다.

20년 만에 사라지는 공인인증제도

현재 쓰고 공인인증서는 전자상거래 시 본인의 신원과 문서의 위·변조, 거래사실 부인 등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9년 전자서명법이 제정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공인인증서 안에는 가입자 전자서명 검증키, 일련번호, 소유자 이름, 유효기간 등의 정보가 담겨 있어 본인 인증에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공인인증서의 불편함이 꾸준히 부각돼 왔다.

공인인증서 제도 폐지 논란의 시발점은 2014년 초 ‘천송이 코트’ 논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지현 주연의 한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인기로 중국인들이 주인공 천송이가 입은 코트를 ‘직구’ 하려고 했다가 국내 공인인증서 시스템 탓에 포기했다는 얘기가 논란이 됐다. 이에 금융당국은 지난 2015년 3월 전자금융감독 규정을 수정해 온라인 쇼핑을 할 때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 할 의무를 없앴다.

고객들의 이 같은 불만이 낮은 편의성 때문만은 아니다. 공인인증서는 보안 면에서도 다소 불안한 부분이 있다. 플러그인을 통해 설치해야 하는 공인인증서는 윈도우XP, 비스타, 액티브X 등의 인터넷 운영체제에 따라 보안 수준이 달라지고, 특히 액티브X 기술의 남용으로 전 국민이 ‘yes’를 누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돼 해커들이 손쉽게 개인 PC에 침투할 수 있어 보안에 취약했다. 악성 코드가 침투라도 하면 인증서 비밀번호와 개인정보 등은 손쉽게 유출되고 이는 지난 2014년 한 해에만 1만 9000건이 넘는 인증서 유출 사건으로 이어졌다. 공인인증서 유출로 인한 금융사고를 막기 위해 지난해 출범한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는 일찌감치 공인인증서를 아예 없애고 지문 등 생체인증 시스템을 채택했으나 기타 시중 은행들은 대체 서비스를 채택하지 않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나서 공인인증 의무사용 폐지에 박차를 가하자 금융권에서 블록체인 기반의 공동인증서 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은행연합회, 블록체인 기반 인증서 ‘뱅크사인’ 도입

지난 6월 10일 전국은행연합회는 은행공동 인증서비스인 ‘뱅크사인(BankSign)’을 7월부터 상용화한다고 밝혔다.

은행연합에 따르면 ‘뱅크사인’은 공개키(PKI·Public Key Infrastructure) 기반의 인증 기술, 블록체인 기술, 스마트폰 기술 등 첨단기술의 장점을 활용해 전자거래의 안전성과 편의성을 높인 우수한 인증서비스다.

‘뱅크사인’의 가장 큰 장점은 기존의 공인인증서보다 보안성이 우수하다는 데 있다. 블록체인의 특성인 분산저장을 통해 인증서 위·변조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개인키 복제, 탈취 및 무단사용 방지에 특화시킨 것. 이뿐 아니라 스마트폰 앱 인증으로 모바일뱅킹과 PC 인터넷뱅킹에서 모두 활용 가능하다. 다만 인증절차의 보안성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인증절차는 스마트폰에서만 가능하다. 스마트폰의 안전영역은 외부접근이 불가능해 해킹 등으로부터 안전한 반면, PC의 경우 안전한 저장 공간을 사용할 수 없어 해킹 등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서다. 인증서 유효기간을 3년으로 확대함으로써 인증서 갱신에 따른 불편도 경감했다. 뱅크사인은 은행권부터 이용을 시작해 점차 공공기관, 유관기관 등으로 이용범위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공동인증서 ‘뱅크사인’과 더불어 은행권의 생체인증을 통한 금융 서비스는 나란히 유지될 계획이다.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홍채·지문 등을 활용한 ‘바이오 공인인증 서비스’는 공인인증서 비밀번호를 숫자나 문자가 아닌 생체인증으로 대체해 각종 금융거래를 빠르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OTP나 보안카드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이체거래가 가능해 젊은 층에서 선호도가 높다. 이에 편승해 국민은행, 우리은행 등의 여러 시중 은행은 일제히 생체인증서 출시에 속도를 냈다. 현재 업계에서 검토되고 있는 생체인증 기술은 음성인식, 얼굴인식, 행위기반 인식 등이다.

금융권 가운데 음성인식을 가장 먼저 선보인 곳은 우리은행이다. 우리은행은 음성인식 뱅킹 서비스인 ‘소리(SORi)’를 내놨다. ‘소리(SORi)’는 음성과 생체인증만으로 조회·송금·환전·공과금 납부가 가능한 음성인식 AI뱅킹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인 케이뱅크 역시 음성인식을 기초로 한 ‘카우치 뱅킹’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로써 약 20년 동안 공인인증서의 독점적 지위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공동인증서와 생체인증서가 대체하게 됐다.

편의성·보안성 둘 다 잡을까

정부는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폐지의 이유로 낮은 편의성과 취약한 보안성을 꼽았다. 그렇다면 공동인증서 ‘뱅크사인’과 지문 등을 이용한 생체인증서의 편의성과 보안성은 과연 어떨까. 전문가들은 기대보다 우려를 먼저 표했다. 단기적으로는 사용자들의 ‘복잡성’이 증가해 ‘무늬만 바뀐 것’이라는 평이 나올 거라는 전망에서다. 현재로서 ‘뱅크사인’은 은행권 전용 인증서다. 앞으로 증권용·보험용 인증서가 등장할 경우, 더 복잡한 설치 과정을 거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공동인증서의 편의성 역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또 가짜 인증서 회사의 등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해커들을 막으려고 새 방침이 마련되면 해커들은 언제나 새 기술을 도입한다. 이 때문에 안전성과 편의성을 높인다는 계획이지만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긍정적 의견을 내놓고 있다. 당장의 불편함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공동인증서는 편의성과 보안기술을 갖춘 인증서로 점차 수렴될 것이라는 것. 사용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새 인증서에 적응해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생체인증서의 안전성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비밀번호가 따로 없고 지문만으로 인증이 가능하다는 점은 높은 편의성을 갖췄지만 보안 면에서는 취약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특히 취객들은 금융사기단의 타깃이 될 수 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의 손가락을 핸드폰에 갖다 대기만 하면 개인정보는 그대로 유출되기 때문이다. 또 음성인식의 경우 정밀한 인식에 필요한 데이터가 300메가에 달해 처리하기 어렵고 소음이 많거나 울림이 많으면 인증이 잘 되지 않는 불편함이 발생한다. 특히 세 차례 인증 시도에 실패하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로 인해 음성인식만 단독으로 본인인증 기술로 사용하기에는 아직 제약 사안이 많다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단기적 잡음을 우려해 정부는 뱅크사인이나 생체인증서 도입 후에도 기존 공인인증서를 병행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제도 폐지에 대한 정부방침이 공인인증서의 우월적 지위를 없애고 이용자의 선택권을 확대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인증서 뱅크사인의 사용은 빠른 시일이 아닌,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은행권을 넘어 정부 및 공공기관, 유관기관 등으로 이용범위를 확대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전자서명법이 개정되면 정부 및 공공부문에서 공인인증서 외 인증수단도 이용이 촉진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정현 기자  news@kpc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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