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왕씨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개창한 신군부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절대군주 시대에 신하가 임금을 몰아내고 왕좌에 오르는 것은 패륜의 극치요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상을 신화의 세계로 끌어들여 천심(天心)이 고려의 왕씨에서 전주 이씨로 옮겨 온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치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혈통적으로 선대에서부터 하늘이 왕통을 점지해 주었다는 정통성을 만천하에 천명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4대조를 왕으로 추존한 대서사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는 악장문학을 창조했다.

海東 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
(우리나라의 여섯 용이 날아서 하는 일(개국창업)마다 하늘이 복을 주시니 중국 옛 성인(殷나라 탕왕, 周나라 무왕의 개국)과 부절을 맞춘 듯 동일하시니 (용비어천가 제 1장)

여섯 마리의 용[六龍]은 잘 알다시피 이태조의 4대조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와 태조(太祖), 태종(太宗)을 이르는 말이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목조시대부터 환조대에 이르기까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도록 하늘이 점지하여 보호해주었으니 고려를 멸하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은 천심(天心)에 순응한 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육룡은 천자(天子)의 수레를 끄는 여섯 마리 말의 미칭(美稱)으로서 ‘천자의 어가(御駕)’를 뜻하므로 이미 그때부터 천자였음을 은유한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역성혁명의 전범(典範)으로 탕무혁명(湯武革命-탕왕과 무왕의 역성혁명)을 내세워 이성계의 혁명도 정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하나라의 걸왕을 몰아내고 상나라[은나라]를 세운 탕왕과, 은나라의 주왕을 몰아내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역성혁명은 백성을 위해 하늘의 뜻을 따른 정당한 거사였으므로 이성계의 그것도 같은 의미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걸왕과 은주왕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황음한 폭군이었기 때문에 천심(天心)이 그들을 떠났으므로 새 왕조를 개창하라는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역성혁명을 단행했다는 자기 합리화가 내재해 있다. 요즈음 종교인들의 분쟁에 ‘신의 뜻’을 인용하듯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천심(天心)을 끌어들였으니 아예 처음부터 반론의 여지를 차단했다. 그래서 신하 창조의 마지막인 125장에서는 천년 전에 미리 정해 놓은 한강의 북쪽에 덕을 쌓아 개국했다(千世우희 미리 定?샨 漢水北에 累仁開國했으니)고 선언하고 후세 임금에게 ‘하느님을 받들고 백성을 통치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경천근민(敬天勤民)’의 경구로 훈계성 당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당성을 확보한 조선왕조는 혈통의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전주이씨의 뿌리를 찾는 작업으로 시조 이한(李翰)공의 묘를 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애쓴 결과가 1899년 전주 덕진의 건지산에 시조 묘역을 정비하고 조경단(肇慶壇)을 조영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숙원사업을 마무리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선언과 함께 고종이 황제에 오른 후의 작업이라서 더욱 빛나는 일이었다.

쿠데타에 실패하면 그 집안은 반역자로 몰려 삼족을 멸하는 폐가의 무시무시한 벌을 받는다. 그러나 성공하면 권좌에 올라 명예를 누리며 정사(正史)의 주인공이 된다. 목숨 걸고 반역을 꾀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기에 이성계도 큰 도박을 한 것이다. 다행히 장고를 거치며 세밀한 계획으로 성공했기에 이성계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모든 역사는 현재로 이어진다는 ‘현재성’의 연원(淵源)으로서 큰 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정몽주를 위시한 온건파의 행적을 보면 이성계의 거사는 명분과 현실정치 사이에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과연 혁명이 최선의 방법인가? 대역부도한 패륜 행위로서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하는가?
최근대사에서 성공한 쿠데타로 여기는 5공 정권의 이야기가 저자거리에서 수없이 회자(膾炙)되었듯,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에게도 역성혁명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었음을 역사의 기록물들이 증거한다.

그러나 이제는 의미 없는 이야기로서 일 뿐, 속절없는 가정(假定) 속에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다만 그 당시의 국가적 이념이 유학(儒學)이었다는 점이 문제다.

유학은 공자, 맹자, 순자 등 춘추전국시대 인물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문이다. 이를 학문적으로는 유학이라 하지만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는 등 조상을 숭배하는 실천적인 면에서는 종교로 이해하여 儒敎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종교는 아니다.

내세에 대한 안내가 없고 실천철학으로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등의 오상(五常) 등 현실생활의 윤리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학의 핵심적인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 중『맹자』는 금서취급을 당할 만큼 황제나 최고 권력자들이 금기시하던 불온(?)서적이었했다. 『맹자』의 ‘양혜왕 하편’에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齊宣王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孟子對曰, “於傳有之.”
曰, “臣弑其君, 可乎?”
曰,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탕왕이 걸왕을 잡아가두고 무왕이 주왕을 쳤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맹자가 ‘기록의 의하면 그런 일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제선왕이 ‘신하가 자기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되묻자 맹자가 답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일컬어 도적놈(賊)이라 하고, 의(義)를 어기는 자를 일컬어 무뢰배(殘)라 합니다. 무뢰배는 (왕이 라 하지 않고) 한 사람의 독재자[一夫]라 합니다. 저는 한 사람인 독재자[紂임금]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대화체를 문장체로 옮겼음)

이 대화 속에는 맹자의 정치철학이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임금은 하늘이 내린 사람[天子]이므로 하늘을 받들 듯 모셔야 하는데 왕이 왕답지 못하면 그로부터 천심(天心)이 떠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새로이 천심이 머무는 훌륭한 인물을 새 임금으로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갈파한 것이다.

여기에는 공자의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 사상이 내재해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이 기본적인 공자의 정명(正名)사상이다.

이 정명사상을 맹자는 단순히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차원을 벗어나 국가적으로 임금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는 정치철학으로 발전 적용한 것이다. 선왕과의 대화를 각색하면 ‘한 사람인 독재자, 즉 필부를 죽였지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는 뜻인데 이 부분이 황제들에게 불온한 내용으로서 지워버리고 싶은 문구였다.

그래서 『맹자』는 한동안 유학자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했다. 북송대의 왕안석(1021~1086)이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으로 채택하고 남송의 주희(1130~1200)가 주자학을 정립하기 전까지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싶은 사상서로서 버려진 책이었다. 그러나 주희가 새로이 성리학을 정리하면서 맹자는 가히 공자의 적통성을 인정받은 2인자의 반열에 올랐다. 맹자가 BC 372년에 태어나 BC 289년에 죽었으니 왕안석이나 주희에 의해 아성(亞聖)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3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에 냉정한 현실 속에서 왕도정치를 이루고자 하는 주희에 의해 맹자는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흙 속에 묻힌 진주를 찾아낸 격이었지만 그러나 그 후에도『맹자』는 외면당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아예 간행을 못하게 하기까지 박대했다. 가난한 농부출신으로서 남의 집 머슴살이는 물론 중노릇을 하며 고생을 하다가 홍건적의 난으로 황제에 올라서 그런지 주원장은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상소문이나 장계(狀啓) 등에 중을 뜻하는 승(僧)자가 있거나 자신의 고생하던 시절을 생각게 하는 문구가 있으면 가차 없이 처벌했다. 역성혁명의 당사자로서 자신도 그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황제로부터 천심이 떠나면 하늘의 뜻을 받은 다른 사람이 역성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맹자의 군주론이 몸서리치도록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맹자』를 간행하지 못하게 하는 등 금서처분을 내렸다가 나중에는 역성혁명에 관련된 내용만 삭제한 후 간행하게 하기도 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자기 자식까지도 믿지 못해 독살해버린 것도 같은 경우다.

태조 이성계, 그는 맹자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고려말기의 왕들은 역성혁명의 대상이 될 만큼 패악하거나 황음하지도 않았고, 폭정을 일삼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역성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병을 핑계로 사퇴하기도 하고 거짓 낙마사태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는 등 철저히 계산된 정치행각을 벌였다. 명분을 쌓기 위한 고도의 술책이었다. 결국 신군부는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고 천심을 잃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등용의 시기를 저울질했다. 일본의 막부가 천황을 폐하고 자신이 황위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천황을 그대로 두고 그 밑에서 권력을 휘두른 것도 유학사상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런 명분 때문에 동양에서는 혁명에 성공했어도 임금의 성씨만 바뀌었을 뿐 모든 제도와 문화에는 변화가 없었다. 서양의 혁명이 군주정이냐, 민주정이냐, 과두정이냐는 등, 권력의 주체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정체의 변형을 보인 것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천심을 강조하는 유학사상과 무관하기 때문에 역성혁명이라 하지 않는다. ‘시민혁명’이며 인권 선언의 권리장전을 제정하는 ‘명예혁명’이다.

경기전(慶基殿)과 조선왕조

2010년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한국 관광의 별’을 제정하여 시상했다. 이는 창의적인 발상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관광지로 발돋움 한 곳이나 관광지를 외부에 홍보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 등을 발굴하여 시상하는 제도인데 2012년까지 3회에 걸쳐 시상했다. 이 시상식은 한국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12개 분야의 후보자와 후보지를 추천받은 후 온라인투표와 관광전문가의 평가, 그리고 일반 국민 참여를 적극 반영하여 선정한다.
그 첫 회 시상식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수상지로 선정되어 ‘한국 관광의 별’로 떠올라 전국 관광지의 맏형이 되었다. 여기에 선정된 면면을 보면 2011년의 인물로는 김연아와 소지섭이 특별부분 공로자로 수상하였고, 관광환대부문에서는 전주 비빔밥, 관광 매력물로는 순천만 생태공원, 안동하회마을 등을 선정했다. 2012년에는 수원화성, 영주 선비촌, 정선5일장, 관광프론티어로는 대구근대골목, 공로부문에서는 가수 카라 등이 수상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전주 한옥마을을 1회 수상지로 선정한 것은 평소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았기기 때문인데, 어찌 그 한옥마을을 가보고 싶은 곳으로 선정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시골이 아닌 도심의 마을인데, 탈도시의 전원생활을 꿈꾸는 현대인들이 어찌 전주 한옥마을을 동경할까?

전주 한옥마을의 매력은 단순히 검정 기와를 이고 있는 집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우리 조상의 전통적인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단연코 그 주변에 있는 경기전과 오목대, 이목대가 있기 때문이며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근대의 문화재 전동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남원에서 황산대첩을 이루고 전주에 들러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를 읊으며 역성혁명의 뜻을 드러낸 곳이며, 이목대는 그의 4대조 목조가 살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왕조와 관련된 유물이 있는 이곳에 위풍 당당하게 서 있는 전동성당은 윤지충, 권상연, 유항검이 참수당한 천주교 최초의 순교지다. 그런 아픔의 현장이지만 성당이 로마네스크식 건물로 아담하고 아름다워 전도연과 박신양이 주연한 ‘약속’을 촬영한 곳이라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이들은 전주성의 정문인 ‘풍남문’에서 동쪽으로 팔달로를 건너 ‘태조로’를 사이에 두고 서있기 때문에 접근성도 용이하다.

경기전은 조선의 역사와 왕실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종묘와 사직을 중심으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 한양에 있다 해도 정작 왕조의 뿌리는 전주다. 지난 호에 살펴 본 조경단이 용비어천가라는 신화의 진원지 찾기의 결과물이었다면 경기전은 왕통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세운 외형적 실체다. 대외적으로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대대로 내려온 왕가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들이 신권 중심으로 왕조를 이끌려 하자 왕권 강화에 힘쓴 태종이 태조의 어진을 모신 어전(御殿)을 지은 것도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방원은 과단성과 용감한 혈기가 있는 무장(武將)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할 만큼 학문에도 뛰어난 문인이다. 그래서 문물제도와 왕권을 세우기 위한 전략 등에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비록 형제를 죽이고 처남과 사돈을 죽여 몰인정한 사람이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지만 악역을 감수한 태종이 없었으면 그렇게 쉽게 건국 초기에 국가의 기틀을 다지지 못했을 것이고, 왕권과 신권간의 내분도 길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세종의 치세가 있었고 한글이 탄생했기에 개인적으로 나는 태종 이방원을 좋아한다. 그렇게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위해 힘을 쏟았기에 전주에 경기전을 세워 왕실의 위엄은 물론 풍패지향으로서 전주이씨의 관향을 드높였다.

경기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명확한 명칭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흔히 경기도의 경기(京畿)와 발음이 같아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경기(京畿)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가까운 둘레지방을 말하지만 경기(慶基)는 경사로운 일의 기틀을 다진 곳을 의미하므로 경기전(慶基殿) 새 왕조를 개창한 경사(慶事)를 일으킨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라는 뜻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전각의 이름이다. 건물에 전(殿)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임금이나 공자, 석가 등 성현과 관련된 집이다. 향교의 대성전, 사찰의 대웅전, 경복궁의 근정전 등과 같이 가장 격조가 높은 경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이다. 그래서 임금을 전하(殿下)라 한다.
경기전은 1410년에 태종이 전주, 경주, 평양에 전각을 짓고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여 어용전(御容殿)이라 했다, 2년 후 어전(御殿)으로 고쳐 부르다가 세종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 등 각각의 전에 명칭을 달리했다. 중앙의 한양과 전주 외에 계림과 평양에도 어전을 둔 이유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완전히 하나가 된 통일의 나라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한양과 전주, 충주, 성주에 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이렇게 세 곳에 어진을 봉안한 어전은 임진왜란 이후 파괴되었는데, 경기전은 광해군 6년(1614년)에 복원하였고, 경주의 집경전은 어진만 강릉으로 옮겼으나 인조 9년(1631년)에 화재로 사라졌다. 경주 북부동의 집경전 자리에 남아있는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비만 남아있는데, 비의 앞면에는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가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숭정기원후 삼무오 사월(崇禎紀元後 三戊午 四月)’이 기록되어 있어 영조14년(1738)에 건립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비가 있는 큰 건물은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경주여중이 사용하던 교사(校舍)다.

역사의 현재성
경기전에서 태조의 어진이나 당시에 사용한 가마, 예종의 태실, 사고, 하마비 등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낡은 역사의 현장, 그것도 패망해버린 왕조의 발원지를 찾는가? 굳이 경주에서 신라시대의 왕릉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집경전 터를 찾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보고 싶은 데 있을 것이다. 경기전의 이성계 어진 앞에 서면 누구나가 다 그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에 숙연한 느낌을 받으며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굳이 이탈리아의 철학자 크로체(1866~1952)가 정의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강조한 역사의 연속성에 의존하지 않아도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 우리 자신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왕은 왕대로, 귀족은 귀족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이기 때문에 역사 앞에서는 숙연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조상을 생각한다. 연천의 숭의전에서는 고려의 역사를 뿌리로 한 오늘의 역사를 생각하지만, 전주의 경기전 앞에 서면 보다 더 실감 있게 역사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도 현재성을 지닌 역사 속의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복원한 경복궁과 광화문에서 환성을 지르며 잃어버린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반기는 것도 그런 의미다. 그것이 우리 실생활에 아무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닌데도 시간과 비싼 입장료를 아깝지 않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Carr(1892~1982)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갈파했다. 이 정의에 의하면 문화재를 찾는 그 순간 모두가 역사가이며, 눈 앞의 문화재를 통해 역사의 사실과 교감하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지나간 일에 대해 참견하고 자기의 스스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싶은 참여의식이다.

2010년에 전주에서는 어진 봉안 600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600년을 상징하는 시민 600명이 어진을 실은 가교(駕轎)에 이은 의장대, 취타대를 따라 전주시청 앞 노송광장에서 경기전에 이르는 2km의 거리를 행진했다.

그와 더불어 2011년에는 ‘경기전’을 ‘전주경기전’으로 명칭을 바꾸고 2012년에는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문 앞에 서있는 하마비를 보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입장료는 하마비의 위의에 대한 예절 같은 느낌이 든다.

덤으로 조경묘, 왕조실록사고, 예종의 태실, 신령한 느낌을 주는 묵은 회화나무 등 다양한 문화재를 볼 수 있는 현장을 관리비로 협조하는 것은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를 확인하는 필요조건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서쪽으로 200m 경내의 풍남문과 남부시장, 북쪽 1km 경내의 객사 ‘풍패지관’도 찾아보고. 가족과 함께 조선왕조의 뿌리와 전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우리문화의 참맛을 느껴보기 바란다.
 

강기옥  k-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오늘의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