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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문화의 이해, 궁녀왕의 여자 궁녀, 그들은 전문직
강기옥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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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15  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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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왕실문화는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가(王家)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당쟁에 의한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의 정치적 부침과 후궁을 낀 권력다툼이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궁녀에 대해서는 일반인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왕실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임금을 둘러싼 권력자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다보니 의외로 궁녀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부분이 많다.

궁녀가 무엇인가? 임금의 여자로 알려진 궁녀는 궐내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은 어떻게 뽑고 어떤 일을 했는가?

영조가 무수리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궁중의 막일을 하는 여인이 무수리라는 정도로 알고 있으나 실상 무리수에 대해서도 정확한 이해는 부족하다.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궁녀는 궁중여관(宮中女官)으로서 상궁 이하의 궁인직을 말한다.

어원대로라면 ‘궁궐의 여성관리’라는 뜻이니 요즈음의 여성 공무원인 셈이다. 이 여성 관리는 내명부(內命婦)에 속하므로 최고의 정점에 왕비가 있다.

이에 비해 외명부(外命婦)는 궁궐 밖의 여인으로서 아버지와 남편의 직위에 따라 봉작을 받는 특수한 신분의 여인을 말하므로 왕비의 관할이 아니다.

왕의 유모와 왕비의 어머니, 왕의 딸과 왕세자의 딸, 종친, 문무백관의 처로서 정경부인, 정부인 등이 외명부에 해당한다.

궁중의 역사는 외명부의 여인보다 내명부의 궁녀가 깊게 관여했기 때문에 사극에서도 극적인 장면에는 꼭 궁녀가 등장한다. 궁녀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2년(1393년) 1월 12일의 기사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 고려 왕조의 공민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신돈(辛旽)의 간사한 계책에 의혹되어, 신돈의 아들 우(禑)를 궁녀(宮女) 한씨(韓氏)가 낳았다고 일컫고, 나이 9세에 강녕 대군(江寧大君)으로 책봉하여 왕대비(王大妃)의 궁전에 두었었다.”

고려시대에도 궁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지리지 부여현(夫餘縣) 조에는 ‘의자왕(義慈王)이 신라에게 패하게 되매, 궁녀들이 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대(落花臺)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궁녀는 이미 삼국시대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선발 과정이나 규모 등 궁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 왕실 문화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두었다는 등의 허황한 전설을 사실처럼 인식하는 걷도 그 때문이다.

이미 KBS의 역사스페셜에서도 밝혔듯이 의자왕의 삼천 궁녀설은 낙화암에 가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과장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도 삼천궁녀라 한다.

왕실 문화의 필수요원으로서 궁녀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보니 패망한나라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이 부정적인 사건으로 일반화한 경우다.

어쨌든 궁녀는 기록상으로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제도적으로 활발하게 왕실문화의 한 축을 이룬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태조 6년(1397년) 3월 15일에 조준과 정도전 등이 내관(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세우기를 청한 기록에 상궁(尙宮)은 3인을 두되 하나는 정5품, 둘은 종5품. 아래 품계인 상관(尙官)은 3인을 두되 하나는 정6품, 둘은 종6품 등 9품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품계와 작호를 내려 인원을 배정할 것을 청했다.

조선시대의 초기에는 궁녀를 원칙적으로 10년에 한 번씩 공노비의 딸 중에서 선발했다.

그것이 후기에는 4년 만에 한 번씩 뽑기도 했으나 각 부서에 한두 명씩 빈자리가 생길 경우 그 주기의 기간을 기다릴 수 없어 상궁이 자기 집안의 조카나 잘 아는 이웃의 여식을 데려 와 보충하기도 했다.

선발 대상의 나이는 지밀(至密이) 4~5세, 침방(針房)과 수방(繡房) 7~8세, 그 외의 부서는 8~13세였다.

그 중 지밀의 나이가 가장 어린 것은 왕과 왕비의 측근에서 시중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왕실 문화를 체득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고, 침방과 수방의 나이도 7~8세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선발하는 것은 바느질과 수를 놓는 것이 숙달된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기술을 일대일로 가르치는 개인교습이 아니라 대부분 상전 상궁의 작업을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을 하며 배우는 도제식교육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많은 기간 동안 세밀하게 기능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燒廚房)이나 빨래를 담당한 세답방(洗踏房),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生果房),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고 내전의 청소를 담당한 세수간(洗手間) 등에서 하는 일은 전문적인 숙련도가 없어도 수행할 수 있는 일이라서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궁했다.

궁녀는 일반적으로 상궁과 나인을 의미하지만 각심이, 방자, 의녀, 무수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종의 여성을 일컫는다.

그래도 일단 궁녀가 되기 위하여 궁궐에 들어 온 아이들에게는 먼저 처녀성의 여부를 감별했다.

팔뚝에 앵무새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려 맺혀 있지 않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보아 본가로 돌려보냈고, 피가 맺혀 있는 아이는 처녀성을 인정하여 각 처소의 상궁과 나인들에게 배속했다.

이들 중 지밀, 침방, 수방에 배속된 아이들은 생머리를 하여 생각시라 하고 나머지는 애기각시라 불렀다.

그렇게 배속된 곳에서 기능을 익히다가 15년이 지나면 계례(筓禮)라 하는 관례를 치렀다. 계례는 혼례 때 길게 땋았던 머리를 쪽을 지어 비녀를 꽂는 의례로서 남자의 관례(冠禮)와 같은 성인식이다.

이 행사에서 ‘항아’라 불리던 생각시나 애기각시들은 임금의 여인이 되는 혼례식이기 때문에 신랑이 없는 결혼식이나 다름없었다.

그 관례를 치른 후부터는 항아가 나인으로 명칭이 바뀌고 두세 명이 한방을 쓰며 각심이의 시중을 받는다.

나인으로 15년을 봉직하면 상궁이 될 수 있으니 지밀의 경우 34세에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세답방이나 소주방, 생과방의 나인들은 43세에 이르러서야 상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밀나인들은 왕과 왕비의 최측근에서 침실을 지키며 날밤을 새우는 힘든 부서였던 만큼 일찍 입궁한 대로 승진의 기회가 빨랐다.

그 절차를 무시하고 초고속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임금의 승은(承恩)을 입는 것이다.

승은을 입은 상궁이나 나인은 당장 섬김을 받는 신분으로 바뀌어 담당업무에서 손을 떼고 오직 임금만을 위해 봉사한다. 이를 승은상궁이라 하는데 승은상궁이 아이를 낳으면 종4품의 숙원에서 정1품의 빈에 이르는 내명부의 직첩을 받는다.

 

 

 

 
 

궁녀의 아들과 딸

   
 

1962년 1월 26일 12시 35분. 김포 공항에 도착한 NWA기편의 문이 열리자 건장한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한 여인이 트랩을 내려왔다.

공항 바닥에는 이들을 맞이하는 여인이 납작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트랩에서 내려오는 여인은 1925년 3월 25일, 13세에 일본으로 끌려가 볼모생활을 한 지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덕혜옹주였고, 큰 절을 올리는 여인은 덕혜옹주를 젖 먹여 키운 유모 변씨와 곁에서 시중들던 박상궁이었다.

덕혜옹주는 고종 황제가 궁녀 양씨와의 사이에서 환갑에 낳은 딸이다. 늦은 나이에 낳았으니 손녀나 다름없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딸이었다. 그래서 아관파천 후 머물던 경운궁(덕수궁)의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할 만큼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사랑을 받던 옹주였지만 7세의 어린 나이(1919년)에 아버지 고종황제가 독약을 탄 커피를 마시고 승하했다. 그 후 기울어가는 왕조와 더불어 부왕을 잃은 그녀의 삶도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제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데려가더니 대마도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시킨 것이다.

조선의 왕족은 일본 황실과 혼인을 해야 한다는 규약에 의한 것이었으니 유학을 떠난 것은 강제 납치나 다름없었다. 조선 왕족을 일본 황실로 흡수하여 내선일체를 완수하려는 얄팍한 의도였다.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의 희생이 된 옹주는 정신질환을 앓아 이혼당하고 어렵게 낳은 딸이 자살하는 등 비극을 맞았다. 그렇게 아픔을 감내하던 옹주가 51세의 환자가 되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제의 속셈은 이보다 앞선 1907년에 황태자에 오른 영친왕을 그 해 12월에 인질로 잡아간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겨우 11세의 황태자를 인질로 잡아 간 후 1920년 4월에 이방자 여사와 강제로 결혼시킨 예를 덕혜옹주에게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의 왕족 나시모토 미야의 맏딸이었으니 일제는 왕족끼리의 혼인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체면(?)을 세워 사전에 민중의 반감을 봉쇄하려는 술책을 썼다.

망해가는 나라의 아픔을 감내하다가 과부하로 쓰러진 왕족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삶에는 왕실의 내명부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덕혜옹주의 어머니 양귀인과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황후엄귀비가 모두 궁녀의 신분으로 승은(承恩)을 입어 후궁이 되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칼날 같은 시기와 질투 속에서도 궁녀를 맞아 왕자와 옹주를 낳고 내명부(內命婦)의 직첩을 내린 고종의 결단 속에는 궁녀의 신분상승에 대한 제도적 특성을 읽을 수 있다.

궁녀와 왕비

옛날 사대부가에서는 딸을 시집보낼 때 유모와 몸종을 딸려 보냈다.

이들은 가마 앞에서 길을 안내하기 때문에 교전비(轎前婢)라 하는데 상전의 시가에 눌러 앉아 그 집 재산이 되기도 하고, 시가의 종들과 사이가 좋이 않아 본가로 돌아오기도 했다.

대개 비슷한 가문끼리의 혼사라서 교전비는 신부댁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필수적인 혼수품으로 여겼다.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비나 빈이 가례(嘉禮)를 올릴 때 친정에서 유모와 몸종 2명을 데리고 입궁하는데 그들을 본방나인(本房內人)이라 한다. 교전비(轎前婢) 출신의 이 나인들은 본래 궁중에 있던 나인보다 격이 떨어진다 하여 상궁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왕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위세가 당당했다. 그런 본방나인 중에 일반적인 관례를 초월하여 상궁이 된 후 임금의 승은을 입은 나인이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명성황후의 교전비 엄상궁이었다. 임금은 왕비의 친정에서 데리고 온 본방나인에게는 승은을 내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고종은 31세의 엄상궁에게 승은을 내렸다. 그래서 궁녀였던 상궁이 후궁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했다.

엄상궁은 명성황후가 고종과 혼례를 치루고 입궁할 때 8세였던 그녀를 데리고 와 아끼던 몸종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임금과 정을 통했으니 명성황후는 그만큼 큰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화가 난 황후가 엄상궁을 죽이려 하자 고종이 사정하여 궁 밖으로 쫓아내는 선에서 시앗문제를 마무리했다.

그 후 1895년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하자 고종은 5일 만에 엄귀비를 불러들여 황후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했고, 2년이 지난 1897년 10월에 40세의 엄귀비는 왕자 이은을 낳았다.

미모는 아니었지만 마음씨가 따뜻하여 승은을 입어 왕비가 된 후 그녀는 진명여고, 숙명여고, 양정고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조선말기에 몸종으로 입궁했던 본방나인이 임금의 승은을 입어 하루아침에 후궁으로 변신한 대표적인 경우다.

궁녀의 생활

꽃다운 나이에 접어든 나인들도 성욕은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방을 쓰는 나인끼리 대식(大食)이라 일컫는 동성연애를 하며 외로움을 달랜 것이다.

대식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을 일컫는데 둘이서 다정히 앉아 밥 먹는 장면을 동성연애로 빗대어 사용했다.

조선의 임금 중에 대식의 피해를 본 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종대왕이다. 첫 번째 휘빈은 김오문의 딸이었는데 세자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하여 방술을 쓰다가 발각되어 쫓겨났고 두 번째 며느리 봉씨는 소쌍(召雙)이라는 몸종과 대식을 하다 발각되어 쫓겨났다. 맹사성을 비롯한 신료들이 가정의 일이니 덮어두자 했지만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 왕이 어떻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느냐며 부원군의 벼슬까지 거두며 내쫓은 것이다.

궁녀의 간통 사건은 왕조실록의 태종대의 기록에서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나타난다. 심지어 별감과 내통하여 아이까지 낳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엄숙한 공간에서도 성적인 문제가 계속 나타난 것을 보면 성은 목숨과도 바꿀 만한 본능인가 보다.

궁녀는 한 번 궁에 들어오면 평생 밖에 나가지 못했다? 아니다. 예외 없는 법은 없다.

왕조시대의 천재지변은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겼다. 관상감을 두어 별자리의 운행과 일기의 변화를 살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궁녀를 내보냈다.

어린 여인이 결혼도 하지 못하고 갇혀 사는 데서오는 한(恨)이 하늘에 닿았으니 그 원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외에 궁녀가 병이 들면 신무문으로 내보내 치료하게 하여 나으면 재입궁시켰고, 상전이 죽은 경우와 병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에도 출궁시켰다. 궁에서는 왕족 외에 다른 사람이 죽을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평생 궁궐에서 사는 동안 이들은 『소학』과 『내훈』 등 학문을 익혔으며 붓글씨를 썼다.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의 여종으로 있던 조두대는 한문은 물론 이두까지 해독하여 수양대군의 총애를 받아 불경간행에 동참하기도 하고, 인수대비의 『내훈』에 발문을 쓰기도 하는 등 궁녀로서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그런 중에 궁체를 개발하여 한글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오늘날 즐겨 쓰는 궁체는 바로 궁녀 조두대가 개발한 서체다.

궁녀의 하루는 무수리와 같은 하급직들은 뼈가 빠지게 고생했지만 한가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나인들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야만 했다.

그래서 도박도 하고 물건을 훔치다 들켜 죽임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조선 역사를 뒤집은 궁녀도 있었다. 숙종이 차후 후궁은 궁녀에서 간택하지 말라고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희빈이다. 당쟁에 얽힌 권력층들이 궁녀를 활동의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무수리는 과부나 나이 많은 여인이 출퇴근하며 궁궐의 궂은일을 하는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전문 업종을 배우는 생각시나 애기각시처럼 상전에 소속되어 궁내에 상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무수리가 영조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신분이 가장 낮은 잡부(雜婦)가 어떻게 숙종을 만나 승은을 입었을까? 그것이야말로 수수께끼며 논식션 드라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모시는 궁녀로서 바느질을 하던 침방나인이었다.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1638년~1672년)은 종6품의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를 지낸 무인이었던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이 생전 직위였는지 사후에 증직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사후 1734년 2월에 영조가 외할아버지인 최효원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서한 것을 보면 생전에 무인의 직위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숙종실록에는 사가로 쫓겨난 인현왕후의 생일을 맞아 최씨가 몰래 생일상이라도 차리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다가 숙종의 눈에 띄었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숙종이 승은을 내려 연잉군(영조)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 중에 장희빈이 인현왕후의 화상에 활을 쏘아 저주한 현장으로 안내하여 희빈의 간교함을 알게 했는데, 장희빈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임신한 최씨를 죽이려고 항아리에 가두는 등의 패악행위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최씨는 숙종 19년 4월에 정4품의 숙원(淑媛), 숙종 20년에 정2품의 숙의(淑儀), 숙종 21년에 종1품의 귀인이 되었다가 4년 후에 정1품의 숙빈(淑嬪)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조선시대 최대의 신데렐라로 알려진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가 아니었다. 1417년에 관비로 뽑혔던 신빈김씨야말로 진정한 신데렐라의 주인공이다.

그 천한 신분의 관비가 나인으로 뽑히더니 1427년(세종9년)에 세종의 승은을 입어 두 번째 후궁이 된 신빈 김씨가 최고의 신데렐라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신빈 김씨의 묘역에는 마음씨 고운 신빈을 닮은 문인석이 날씬한 모습으로 서서 지키고 있다.

왕의 여인 궁녀는 월봉을 받았으니 가난한 시절의 부러운 직종이었다.

부모와 생이별하듯 궁월에 갇혀 엄한 계율과 제도 안에서 살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왕궁의 안살림을 도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한 몫을 한 왕실문화의 한 축이다.

전문직종인으로서의 궁녀, 그들에 대하여 바로 아는 것도 왕실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강기옥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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