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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조광조에게 개혁을 묻다21세기형 국가개조는 ‘노련한 개혁가’ 필요
마연옥 기자  |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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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01  17: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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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11월 15일 밤. 역사상 유래가 없는 한밤의 숙청이 이루어졌다. 중종은 밤을 틈타 사헌부 대사헌 조광조의 체포령을 내렸다. 혼란에 빠진 조선을 개혁해 이상사회로 만들고자 했던 조광조, 그의 개혁의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조광조는 폭정으로 무너진 조선사회를 바꾸려 한 사상가이자 개혁가였다. 그는 백성들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 즉 주민들이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 문화를 정착시키고 토지제도를 개혁해서 백성들이 두루두루 잘 사는 개혁안을 만들려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꽃처럼 살다간 조선의 개혁가였다.

그는 34살에 관직에 입문해 초고속 승진을 통해 조정의 실력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개혁추진 과정에서 그를 신임하던 중종에게 돌연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개혁 또한 중단되고 말았다.

후세의 사가들은 그의 개혁이 급진적이라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편협된 시각이다. 절반은 실패, 절반은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결코 좌절되지 않았다. 그의 개혁정신만은 높게 평가되어 이후 사림이 중심세력이 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서민들 삶속으로 파고들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국가개조가 시급한 상황에서 ‘21세기형 개혁의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조광조의 실패와 성공에서 배운다면 말이다. 21세기형 개혁은 열정이 앞선 개혁이라고 하기보다는 속도조절을 할 줄 아는 노련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같이 흐를 줄 아는 개혁. 세차면서 빠르게 흘러야 할 때는 빠르게 흐를 줄 알고 돌아갈 때는 돌아갈 줄 아는 유연함, 즉 속도 조절을 할 줄 아는 노련한 개혁 말이다.
   
 

임금은 마음으로 백성을 감화시켜야... 위대한 역사 만들 수 있다

1506년 9월 2일 대궐은 포위돼 연산군은 폐위되고 배다른 동생인 진성대군이 새 왕으로 추대됐다. 그가 바로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이었다. 고영진(광주대)교수는 '중종반정은 한편에서 보면 괘도에서 벗어난 조선을 북귀시키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정을 주도했던 세력이 그 이전의 지배세력이었던 훈구세력이었고 훈구세력이 가진 모순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시 조광조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였다. 대국공신 조원의 후손이었던 조광조는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학문에 몰두했다.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성리학을 배운 조광조는 실천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신진학자였다.

당시 사화가 일어난 직후라 대부분의 백성들은 성리학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광인취급을 받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29세 되던 해 조광조는 마침내 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한다. 그리고 5년 후, 임금이 직접 시행하던 알성시에 응시한다. 중종은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조광조는 임금이 마음으로 백성을 감화시켜야 하며 대신을 믿고 함께 국사를 처리할 때 위대한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답했다. 조광조의 답안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광조는 알성문과에 급제해 언관직인 사관원 정헌에 임명된다.

사관원 관리로 임명된 직후 조광조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중종 당시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 무안 현감 유호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상소를 올리게 된다.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중종을 왕위에 추종한 반정공신들은 왕에게 신씨를 폐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왕비 신씨는 연산군 측근의 딸이므로 국모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신씨는 중종반정 당시 연산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살해된 신수근의 딸이었다. 비록 중종의 비였지만 반정공신들에게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반정공신들은 왕비가 언젠가 아버지를 죽인 자신들에게 복수할 수 있음을 염려했다.

지식이나 능력만으로는 안 돼, 인품과 인격 겸비한 새로운 인사제도 필요

결국 반정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신씨는 폐위되고 만다. 이에 반대해 순창군수 김정과 박상은은 왕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죄없는 왕비를 내치는 것은 유교적 윤리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하가 임금을 위협해 왕비를 강제로 쫓아낸 사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유교윤리의 문제를 넘어서 사림과 훈구세력의 대결로 번져갔다.

이때 조광조는 상소를 올려 대간전체의 파직을 요청했다. 사간원의 말단관리가 올린 대간 전원의 파직요청은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몇 달에 걸친 논란 끝에 대간 전원이 교체된다. 이때부터 조광조는 조정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종 6품 관리로 처음 공직생활을 시작한지 3년만에 종 2품으로 승진해 사헌부 대사헌의 자리에 오른다.

이처럼 조광조의 고속승진은 중종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종은 폐비 신씨 복위 논란 이후 조광조를 삼사위주의 요직에 등용하며 가까이에 두었다. 당시 왕권은 반정공신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중종은 반정 삼공신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권세에 눌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종 8년, 반정 삼공신이 모두 사망하면서 공신세력이 약화되자 중종은 새로운 인재를 뽑을 것을 명한다. 그것이 사림파였다.

중종의 명령으로 당시까지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학문을 연구하는데 주력했던 사림세력이 대거 등용된다. 중종 때 등용된 사림파는 100여명 이상으로 대부분 언론기능을 담당하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에 포진되었다. 사림은 훈구파 일색이었던 중종 초기정치세력의 판도를 뒤집으며 정치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그 중심에 조광조가 있었다.

   
 
조광조와 사림세력은 훈구세력을 압박하고 사림세력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인재등용제도를 개혁하기를 모의한다. 이들이 생각해 낸 것은 현량과. 시험만으로 인재를 뽑는 과거제를 탈피해 추천받은 인재를 시험을 통해 검증하는 것이었다. 최이돈 (한남대)교수는 사림이 훈구세력과 대결에서 확고히 깨달은 것은 인사가 단순히 지식이나 능력만 가지고 안 되겠다. 인품, 인격을 감안한 인사제도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럴 때 조광조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천거제를 바탕으로 한 과거제를 가미한 현량과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현량과를 통해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인재를 뽑을 것을 건의한다. 사림파의 이런 주장은 훈구파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중종 14년 3월 김우중 모반 음모사건이 일어난다. 정국공신 김우중이 현량과 실시를 주장하던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모의를 하다 발각된 것이다. 김우중 사건이 적발되면서 현량과 실시는 더 큰 힘을 얻는다. 왕은 결국 한달 후, 사림파의 손을 들어 현량과를 실시한다. 이때 선발된 관리는 모두 28명. 대부분 사림출신의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요직에 등용되어 고위직 관리로 성장해갔다.

비가 안 와도 임금 탓, 관리 잘못도 임금 탓 ...대통령 탓하는 세월호 보는 듯

여기서 조선시대의 왕들의 생활풍속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왕들은 임금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학문과 교양을 갈고 닦아 성군이 될 것을 요구받았다. 임금 역시 대신들과 함께 하루 네 번 경연에 참석했다. 이와 관련 신병주 박사(규장각한국연구원)는 '원래 학문을 토로하는 성격을 띄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학문내용을 가지고 정치 현안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국정에서 해야할 일, 왕으로서 처신, 민감한 정치 상황도 논의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는 아침에 하는 조감, 낮에 하는 주감, 저녁에 하는 석감뿐만 아니라 밤에도 경연관으로 불러 토론하는 대대까지 열기도 했다'고 전한다.

조광조는 특히 중종에게 경연을 강조했다. 그는 경연을 통해 계속 압박해 갔다. 그러나 중종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경연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도였지만 임금에게는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다. 태종은 경연이 왕권을 속박한다는 이유만으로 등한시했고 세조와 연산군은 이를 폐지하기까지 했다.

중종 역시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침, 낮, 저녁, 밤까지 하루에 네 번을 한 적도 있었다. 오후 쯤 되면 하품이 나고 졸음이 쏟아지는데 먼저 끝내자고 할 수도 없었다. 명색이 왕인데 여러 대신들 앞에서 부덕하고 학문이 부족하다며 몰아세우고 지진이 나도 임금 탓, 관리가 잘못한 것도 임금 탓이며, 모든 걸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하니 중종의 입장에서는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는 요즘 시대에까지 이어진 듯하다. 세월호에서 보았듯이 그동안 적폐되어 있던 관피아와 선장의 부도덕한 양심부재에서 일어난 사고임에도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일부 세력들은 행동은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다. 오랜 시간 거슬러 올라가자면 왕권이었던 조선에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주자증손여시향약 유포, 지방 수령들 수탈 막아 백성을 보호하다

조광조는 조선을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로 개혁하고자 했다. 위로는 훈구세력을 아래로는 지방의 수령세력을 견제하면서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한 개혁을 펼쳐 나갔다.

소격서는 나라에서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세운 관청이었다. 비가 안 온다던지 질병이 많이 나돌 적이나 국가에 흉한 일이 생겼을 때 없애달라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소격서는 조선 태조 때 경복궁 바로 옆에 건립되어 임진왜란까지 200년 동안 도교의 행사를 주관했다. 그러나 성리학자였던 조광조에게 도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황에게 상소를 올려 소격서를 폐지할 것을 건의 한다.

처음 중종은 왕실에서 의례적 기능을 했던 것을 폐지하는 조광조의 말을 거부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끊임없는 소격서 철폐 상소에 마지못해 소격서 철폐를 명한다. 이처럼 조광조가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격서 철폐한 것은 성리학을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광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문을 향촌사회로 실행할 꿈을 꾼다. 그것이 바로 향악이었다.

   
 
좋은 일은 권장하고 잘못은 고쳐주며 예를 지켜 사귀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주자증손여시향약을 전국에 유포했다. 마을에는 동헌이라는 법률이 있어서 마을의 질서를 지키는 기준이 되었다. 향약은 마을의 공동체 문화를 정착시킴과 동시에 마을의 주민들을 부패한 수령들로부터 지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 향촌에는 부패한 훈구파와 결탁한 지방 수령들의 횡포가 심했다. 사림들은 주민자치 조직을 강화해 그들의 수탈을 막으려 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빈부격차가 심각했다. 부패한 관료들은 권력을 이용해 넘치도록 부를 축적한 반면 백성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을 위해 조광조는 토지제도를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토지를 국유화해서 균등하게 나눠주는 균전법과 토지소유 상한선을 정해 땅이 특정인에게 편향되지 않도록 하는 한전제를 시행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조광조의 개혁안은 훈구 대신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산다. 그러나 조광조와 사림세력은 훈구세력을 압박하면서 이상사회를 향한 개혁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1519년 결정적으로 훈구파에게 타격을 주는 개혁안을 내놓는다. 117명의 중종반정의 대국공신들은 호위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공을 세우지 않고도 공신에 추대되었다며 문제를 제기하면서 부당하게 공신이 된 자들을 숙청할 것을 요구한다.

당시 공신이 되면 작호는 물론이고 토지와 자손이 과거에 진출할 수 있는 음서, 그리고 심지어는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죄가 감해지는 특권까지도 가졌던 것이 공신이었다. 공신은 후손 대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았다. 특히 반정삼공신 중 하나인 박원종은 큰 연못과 정자가 있는 집에서 매일 수많은 기생을 불러 음주가무를 즐길 저어도로 사치했다고 한다. 중종시대의 정국공신은 다른 시대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았다.

 

走肖爲王으로 막 내린 비운...성리학으로 부활하다

 

이들 중에 부당하게 공신에 책봉된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처럼 부당하게 책봉된 많은 공신은 국고의 낭비일 뿐 아니라 개혁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조광조와 사림은 이들을 공신록에서 삭제할 것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조광조와 사림은 상소를 올려 부당하게 공신에 책봉된 자들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른바 위훈삭제를 요구한 것이다. 중종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반정의 혜택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중종은 망설였지만 사림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결국 전체 정국공신의 70%에 해당하는 76명의 명단이 삭제된다.

위훈삭제는 사림의 승리였다. 훈구파들의 기세를 한 순간에 떨어뜨린 위훈 삭제 이후 조광조는 명실상부하게 조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중종마저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위훈삭제는 조정에 엄청난 후폭풍이 일게 했다. 훈구파들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위훈삭제 직후, 궁안에는 이상한 나뭇잎이 돌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주초위왕(走肖爲王), 여기서 주와 초가 합하면 조가 된다.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중종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결국 중종은 훈구대신들에게 밀서를 내리고 조광조와 그 측근들을 압송했다. 이렇게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조광조, 당시 나이는 43세였다.

그의 개혁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의 정신은 이후 조선 사회를 관통해 면면히 흘러 나갔다. 조광조가 파직된 이후부터 조광조의 복권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성리학은 조선왕조에서 도전할 수 없을 정도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점에서 조고아조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조광조의 정치인생을 짧지만 그가 남긴 개혁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이황은 그에 대해 뜻은 높았으나 정세전반을 파악하지 않고 무리하게 추진한 점과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협을 이루지 못한 점을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또 이이는 조광조가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학문이 무르익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아가 좌초했다고 평가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마연옥 기자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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