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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산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대한민국은 왜 그에게 열광하는가?
마연옥 기자  |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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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01  17: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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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극 정도전이 연일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처럼 새삼 정도전에 새롭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살았던 고려 말과 오늘날의 상황이 놀랍게도 닮았다는 점이다. 일부가 부를 독점하고 중산층이 몰락하며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모습은 권문세족이 득세하던 고려 말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이 때문에 비정상적인 일들이 관행처럼 이뤄지고 부정부패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작금의 사태를 정부가 특단의 조치로 국가개조를 하지 않으면 고려가 망했듯이 우리나라도 망국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여론마저 일고 있다.

조재현은 지난달 10일 경기도 수원 KBS 드라마 센터에서 열린 KBS TV 대하사극 ‘정도전 기자 간담회’에서 “지금이 600년 전의 고려말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특히 그는 “예전에는 백성들이었던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낮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하면서 “그래서인지 국민들도 새로운 정치를 펼쳐줄 누군가를 바라는 것 같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 깊이 새겨볼 대목이기도 하다.

정도전을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역사는 반성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조선 서거정의 <동국통감>처럼 역사 기록에 거울감(鑑)자를 쓰는 이유가 역사는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란 인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도전을 보면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비정상적인 관행들이 횡행하여 부정부패 비리로 얼룩진 현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앞선 개혁가이자 혁명가였던 정도전을 살펴보면서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정도전은 그는 누구인가

     
 
삼봉 정도전은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조선의 토대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불교, 귀족중심의 정치의 나라였던 고려를 붕괴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하지만 모두가 군자가 되는 나라, 백성을 위한 나라, 그리고 재상 중심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이방원과 통치방향이 달랐다. 지금 말로 하자면 정도전이 입헌군주식 내각책임제를 추구했다면 이방원은 중앙권력형 군주제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 혁명에 성공한 개국공신이지만 최후는 비참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내내 역적의 굴레가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는 성공했다.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죽어서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꿈꾸었던 나라, 사대부중심의 새로운 나라, 조선은 유교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도전(1342~1398)은 본관이 봉화다. 선향이 경북 영주지만 태어난 곳은 도담 삼봉으로 유명한 충북 단양이다. 단양은 외가가 있던 곳이다. 그의 호 삼봉(三峰)은 도담삼봉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1388년 ‘삼봉에 올라’라는 시도 남겼다. 일찌감치 개경으로 올라온 그는 19세에 성균시,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을 시작했다.

집안은 대대로 고향 영주에서 향리 벼슬을 지냈다. 하지만 삼봉은 한 시대를 풍미한 혁명가였지만 그 출신은 미천했다. 실록에는 “승려 김진이 종의 아내와 간통해 도전의 외조모를 낳았다”고 적혀 있다. 종의 자식은 천민이니 곧 그의 어머니 우씨 부인 역시 천민인 셈이다. 고려 땐 서얼 차별이 없어 과거에 나갈 수 있었지만 “천한 곳에서 몸을 일으켜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서 그를 괴롭혔다.

이러한 한계에도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고려 조정의 친원 외교 노선을 반대하다가 당시 실권자 이인임의 미움을 사 3년 유배 생활을 포함해 1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귀족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반노비 신세로 전락한 민초들을 접한다. 그들의 처참한 삶을 통해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공맹의 가르침을 피부로 실감하고 정치란 벼슬아치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가슴 깊이 깨우친다.

 

개국 후 죽기까지 6년 동안 그의 업적은 놀라울 따름

그리고 그는 나라 안의 모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는 시대를 초월한 토지 사상을 구상하게 된다. 권세가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구체제 아래에서는 개혁이 불가능했다. 1383년 42세 삼봉은 오랜 유랑을 끝마치고 마침내 혈혈단신으로 군벌로 성장한 이성계를 찾아가면서 역성혁명에 불을 붙였다. 개국 후 죽기까지 6년의 짧은 기간 이룩한 그의 업적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조선시대 헌법에 해당하는 ‘조선경국전’과 정치구조 ‧ 관료체제를 정리한 ‘경제문감’을 통해 국가 통치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는다.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이씨 왕조 개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사’도 편찬한다. 한양 천도를 책임지면서 궁궐과 도성(都城)축조, 종묘의 위치, 전각의 이름까지 직접 고안했고 서울을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오늘날 많은 행정구역과 그 명칭이 이로부터 유래한다. ‘진법’ ‘오행진출기도’ ‘강무도’ 등 다수의 병법 이론서를 펴냈고 종묘에 사용된 예식이나 궁중음악도 그의 손을 거쳤다. 과전법을 실시해 토지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서울이라는 지명의 탄생과 관련된 속설을 조선후기 방랑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성을 쌓으려 했으나 둘레의 원근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눈이 녹은 지역이 도성 안이 됐다. 눈이 쌓여 생긴 울(울타리)이라고 하여 도성 안쪽을 ‘설울’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서울’로 전이됐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서울의 유래에 관해 또 다른 설은 수도(首都)를 나타내는 우리말로 처용가의 첫 구절 '새벌'이 서라벌을 거쳐 서울로 변했다는 양주동의 풀이가 있다. 새벌이 서울의 옛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우용은 삼한시대의 성스러운 곳 소도(蘇塗)의 '소'가 새벌의 '새'와 같으므로 서울은 '솟벌'이나 '솟울'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솟은 벌'이나 '솟은 울'이 '신의 땅'이나 '신의 울'이며 한자로 번역하면 신시(神市)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전해진 서울이란 지명은 1896년 4월 7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처음 공식 표기됐다. 독립신문 한글판의 제호 아래 ‘조선 서울’이라고 표기하고, 영문판에서는 ‘SEOUL KOREA'라고 발행지를 인쇄했다. 이것이 서울이 ’서울특별시‘가 된 유래다.

 

그가 꿈꾸던 정치체제는 재상국가

실록에 따르면 그는 공공연하게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왕은 절대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유능한 재상을 선출하고 이들이 합리적으로 정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을 이씨들의 나라로 만들려는 이방원과는 근원적으로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도전에게 정치란 도덕윤리의 실현과정으로서 인간을 바르게 하여 백성을 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의 주체로 윤리도덕을 체득한 자를 설정했다. 그러한 자격자가 성리학자인 사(士)로서, 진정한 士는 윤리 ‧ 도덕가일 뿐만 아니라 성리철학자여야 하고 천문‧의학‧지리‧복서(卜筮) 등 기술적인 학문에도 능통해야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고 역사가이며,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士)는 고정된 세습신분이 아니라 자질이 뛰어난 자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아서 士가 될 수 있으며, 농사를 겸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고 있으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국가, 즉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건강한 국가를 만들려 노력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조선의 키워드는 절대왕정이 아니라 백성이 중심이 된 나라였다. 비록 모든 백성은 아니지만 왕이나 귀족을 넘어 일반 백성들도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DNA는 오늘날에도 전해져 내려온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정치에 관심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은 이유일 듯싶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고 토론과 철학의 나라였다. 그러나 후기로 넘어오면서 탁상공론에 빠져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조선다움은 바로 책과 논리적 사유를 낳은 성리학이다. 16세기에 성리학을 꽃피우고 17세기에 실학자들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조선을 당쟁의 나라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지나친 식민주의적 역사관일 뿐이다.

 

정도전은 방대한 저술 남긴 대학자이면서 혁명가

통치체제로는 민의 보호를 위해 지방토호에 의한 자의적인 지배를 배제하고 중앙정부에 의한 전국적 지배를 강화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그 중심은 군주였다. 군주는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전국의 토지와 민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재상중심체제를 지향했으며, 통치자의 부정 ‧ 독재를 막기 위해 감찰권과 언권(言權)의 강화를 중시했다. 통치윤리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형벌은 보조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민본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부국강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정도전은 사병혁파를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세우려 했다. 고토인 요동 수복을 말년에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해산된 사병을 훈련시켰다. 이 과정에서 훈련에 소극적인 왕자들에게 태형을 가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이 백성 위에 군림했던 조선에서 백성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그는 위험천만한 인물이었다.

최근 정도전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데 대해 역사 전문가들은 오늘날 혼란스러운 정치 사회가 여말선초 격동의 시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우경화로 국제정세가 예측 불허의 혼란을 겪고 있고 국내적으로도 청년실업과 양극화 문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현 상황은 원명교체기에 토지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진 여말과 매우 흡사하다”며 “그런데 정치권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네 탓 공방만 하면서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법 ‧ 제도에서 종교, 국방, 도읍지, 조세, 교육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이면서 이론에만 밝은 경세가가 아니라 현장을 아는 실천가였다. 더욱이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백성의 귀중함을 알았고, 국왕과 관료는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정도전의 개혁에서 현 시대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삼봉이 변화와 개혁을 꿈꾸던 시기는 고려말기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득세하던 시기다. 정도전이 22세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지만 정국을 주도하던 권문세족과 충돌해 유배길에 올랐다. 정치적 시련기를 맞은 그는 유배지에서 백성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사회개혁을 꿈꾸게 된다. 당시 권문세족은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며 왕보다 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이 소유한 땅의 크기는 산과 하천을 경계로 삼아야 할 정도로 넓었지만 세금은 한푼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땅을 더 넓히기 위해 양민을 착취하고 노비로 만드는 전횡을 일삼았다. 정도전이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성리학의 위민(爲民‧백성을 위함)사상을 토대로 한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것은 고려말의 이런 부패 때문이다.

고려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은 나라 이익보다 개인의 치부에 힘을 쏟았다. 국고는 비어가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지는데 권문세족 곳간만 차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변화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적 당위성을 뼈저리게 통찰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그의 가슴 속에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애민정신을 품고 이상적 ‧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정도전은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며 백성을 눈물을 닦아주려 했던 것이다. 이는 곧 그의 중심사상이 위민정신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도전의 작가 정현민씨는 정도전에 대해 ‘정말 뜨거운 사람, 참으로 진보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정도전이 가지고 있는 키워드가 민생이라고 강조했다. 정현민 작가는 “조선 건국 후 6년간의 과정을 보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있었는지 감탄스럽습니다. 경복궁을 비롯한 궁과 4대문, 동네 이름을 직접 작명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경복궁을 지을 때도 절대 담을 높이면 안 된다고 했답니다. 백성과 거리를 두면 안 된다고요. 그는 우직하다 싶을 만큼 요순시절의 이상사회를 꿈꾸면서도 매우 급진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입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혁명가가 되는 원동력은 감수성이라고 강조했다. 즉 백성,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섬세한 감수성이 있어야 혁명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기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을 저지르고 비리로 얼룩진 현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로 과감하게 개혁의 칼을 든 사람에게는 냉철한 이성과 국민을 향한 뜨거운 애민정신을 불태워서 개혁을 향해 나아갈 때, 또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추진력과 청렴함이 구비될 때만 비로소 성공적인 개혁을 이룰 수 있다.

 

마연옥 기자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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