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참 많은 것들이 눈 깜짝할 사이 변해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소중한 것, 잊고 싶지 않은 것은 이왕이면 오래 간직하고 싶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으면 싶다.

폭염으로 힘들었던 여름이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면서 서늘해진 8월의 중순, 서울 신촌로터리에 있는 ‘홍익문고’를 찾았다. 홍익문고는 개업 이래 현재까지 같은 장소를 지키고 있는 가장 오랜 서점이자, 서울 시내의 대표적 동네 서점이다.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 속의 장소, 지금까지도 신촌을 찾을 때면 으레 약속 장소로 정하게 되는 약속 장소의 대명사가 바로 홍익문고다.

필자의 기억 속 첫 서점도 바로 홍익문고. 유년기에서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신촌에 살았던 필자와 홍익문고의 박세진 대표(49)는 그때 그 시절, 같은 반 친구였다.

이후 필자는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많이 다녔지만 홍익문고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박세진 대표와의 오랜 인연을 이어올 수가 있었다.

2012년에는 재개발 계획으로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아직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홍익문고. 이하 40년 지기 홍익문고 박세진 대표와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홍익문고, 문을 연지 얼마나 되었나?

창업주인 선친 박인철 씨(2009년 작고)가 1958년에 세우셨으니 올해로 60년째다.

처음에는 지금 자리에서 약 10m 떨어진 위치에서 손수레에다 과일도 같이 파는 행상 형태였다. 아버지는 1957년부터 청계천 중고서점 ‘대학천’에서 책을 떼어다가 인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전이나 헌책을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 판잣집 같은 점포를 얻어서 1958년부터 홍익문고를 열고 운영하게 되었다.

그렇게 판잣집 형태로 ‘홍익문고’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어머니 김영애 씨를 만난 게 1967년. 두 분은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책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동대문에서 버스로 책을 사서 나르며 성실하게 일하셨고 장남인 내가 태어나면서 지금의 홍익문고 1층에 세를 얻었다.

내가 복덩이였는지, 이후 서점은 잘 되었고,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건물 전체가 우리 집이 되었다.

-홍익서점은 언제부터 2대 박세진 대표가 맡게 되었나?

서점을 운영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우리 삼 남매는 남부럽지 않게 실컷 책을 읽으며 자랐지만 부모님 두 분은 물론이고, 우리 삼 남매에게 용돈을 넉넉히 주시거나 좋은 옷과 학용품을 사주신 적이 없었다.

내 기억은 다섯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서점 한쪽 부모님이 생활하셨던 골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부모님은 책을 유산으로 물려주셨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중할 때인 2009년,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다. 인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던 나는 당시 16년 차로 부장이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점 일을 맡아서 시작하게 된 것. 막상 서점 대표가 되면서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해야 되자, 힘겨운 일이 많았다.

2남 1녀 중 장남에다 집안에서는 장손이어서 집안일과 서점일, 세무 관련 일까지 회사원으로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하나둘 경험하며 시행착오도 고충도 많았다.

-‘홍익문고’의 ‘홍익’이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한 것인가?

누구는 ‘홍익문고’의 ‘홍익’이 ‘홍익대학교’에서 따왔냐고 묻기도 하는데 ‘홍익’이란 말 그대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정신’에서 따왔다.

아버지는 ‘홍익정신’을 바탕으로 고객과 출판사, 직원과 가족, 네 가지를 항상 생각하고, 도움이 되게끔 하라고 강조하셨다.

‘홍익문고’에는 현재 직원이 20명인데 그 중에는 30년을 근무한 직원도 있고, 10년 이상 근무한 직원도 여럿이다. 이처럼 사람을 소중히 하고, 일을 계속하게 하는 것, 아버지는 그런 부분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셨다.

또한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다문화가정 등을 도우는 일을 꾸준히 해오셨다. 나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 계속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신촌에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 하셨는데 언젠가는 그 뜻을 받들어 실천하고 싶다.

-그러던 중 서점이 없어질 위기가 닥쳤다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럭저럭 서점 일에 적응할 무렵, 온라인 서점이 성행하고 스마트폰 열풍이 시작되었다. 그때 주변의 많은 서점이 문을 닫기도 하고 그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2년에 우리 서점이 있는 서대문구 창천동 일대가 서울시와 서대문구청의 상업, 관리·숙박시설 건립을 위한 재개발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가게를 내놓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눈앞이 깜깜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중 정신이 번쩍 났다. 아버지가 수십 번 보셨다는 삼국지, 그중 자주 강조하시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이라는, 죽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이긴다는 뜻으로, 현명하게 대처하면 제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태를 수습하기에 나섰다.

내가 먼저 마음을 고쳐먹자 주변 분들도 도와주기 시작하셨다. ‘홍익문고 지키기 주민모임’으로 시민단체와 2천여 명의 사람들이 힘을 보태주셨고, 일주일 만에 5천500여 명이 철거 반대 서명에 동참하는 기적을 이뤘다.

결국 그해 11월, ‘홍익문고’는 도시환경 정비구역에서 제외되고 우리 서점은 이 자리에 계속 남을 수 있었다.

-이후, 달라진 점은? 다시는 그런 일이 또 생기지 않을까?

그날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사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장남인 내가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었고, 어쩌면 의무감으로 받아들였지 스스로의 특별한 동기부여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계획으로 서점이 없어질 위기를 겪으면서 과연 소중한 게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할지 그 때 비로소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50년 동안 서점을 일구고 지켜온 정신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시간은 내가 제대로 만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그때 했다.

그때부터 “백년서점, 홍익문고” “소중한 것은 시간을 넘어 이어진다”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만들었다.

지금도 그 때 나를 도와주었던 많은 분들을 기억하고 있고, 몇몇 분들과는 계속 교류를 하고 있다. 당시 연세대학교 총장이셨던 정창영 총장님도 오셔서 사태를 잘 수습하기 바란다고 힘을 주셨고, 많은 분들이 ‘서점을 지키자’는 뜻에 동참해주셨다.

사실 나와는 특별한 연고도 없는 분들인데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든든한 우군을 만난 느낌이었고, ‘이런 고마움에 보답하려면 서점을 오래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같은 도시계획 문제로 다시 우리 서점이 없어질 위기는 이제 없을 것이다. 다만 요즘 서점 운영이 많이 힘들다.

우선 이 동네는 주로 학생들이 많이 찾는 상권인데 학생 수가 연 5~6%씩 감소하고 있고, 가까운 주변에 대형 서점이 들어서고, 앞으로 들어설 예정이라 매출 면에서 전망이 어둡다.

또한 책을 찾는 사람들도 현저히 줄고 있다. 내가 맡아서 운영한 지가 햇수로 10년, 만 9년 쯤 되는데 그간 매출이 20% 정도 감소했다.

가끔 서점이 연탄가게처럼 되는 게 아닐까 싶은 불안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럴 때면, 3,4층에 아버지가 직접 제작한 손때 묻은 책장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아버지는 목수도 안 쓰시고 손수 진열대를 만드시고, 지문이 닳을 정도로 피땀으로 서점 안 곳곳을 직접 수리하시고 손보시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는 못하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 서점만의 문화를 만들어가야지 다짐하고는 한다.

-‘달리는 피아노’ 같은 문화운동에도 동참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변화를 꾀하고 있다. 우선 직원만 출입이 가능했던 5층 공간을 개방해서 지역주민들이 문화공연이나 독서모임 등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서울시가 비영리단체와 진행하고 있는 ‘달려라 피아노’를 우리 서점에서 함께 한다. 서점 앞에 있는 피아노에 다섯 명의 정기 연주자가 와서 돌아가며 연주를 하고 있으며 그 연주자들 사이에 누구라도 와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반가운 일은 2013년에 우리 서점 앞이 서대문구청이 지정한 ‘문학의 거리’가 되면서 윤동주, 최인호, 김남조, 이어령 등 15인의 작가 동판 핸드프린팅이 설치됐다.

서대문 구청과 함께 준비하면서 많은 감동도 있었고, 이런 감동이 고객에게, 우리 서점을 찾고, 서점 앞을 지나가는 모든 분들에게 전달이 되었으면 싶다.

앞으로도 시민이 함께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행사나 이벤트를 계속 만들어갈 것이고 서점 5층은 시민들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사랑방으로 문을 열어둘 것이다.

-홍익문고만의 아기자기함, 동네 서점으로서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 서점에는 지하 1층에서 지상 4층까지 오십여 만권의 책이 있다. 이중 수험서부터 문학서적, 전문서적, 실용서까지 다양한 책이 있는데 사실 나는 베스트셀러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1층에는 누구라도 들어와서 겨울에는 좀 따뜻하게 있다 갈 수 있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머물며 책을 볼 수 있게 하면서 각 코너마다 좀 유머러스하고 눈길을 끌만한 ‘문구’를 적어놓는다.(필자가 찾아갔던 날 쓱 돌아본 1층 매장에는 시 코너 앞에 “그대들도 마땅히 그대들의 시를 쓰게나” -정약용, “독서할 때 당신은 항상 가장 좋은 친구와 함께 하고 있다”-시드니 스미스 등과 같은 문구를 볼 수가 있었다.)

베스트셀러와 관계없이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선생님들의 모임’에서 제공하는 ‘책따세 추천도서’ 코너를 마련한 것은 베스트셀러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묻힐 수도 있는 보석 같은 좋은 책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대학생 아들이 서점을 이어가겠다고 한다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땠나?

대학생 아들 둘을 두고 있는데 큰아들은 영문과, 작은 아들은 요리 공부를 하고 있다. 둘 다 지금 군대에 가있는데 돌아오면 큰 애가 서점 일을 배우겠다고 한다.

서서히 서점 일을 가르치다가 직장생활도 좀 경험하게 한 뒤에 서른 살쯤 되면 그때 서점을 물려줄 생각이다.

처음 아들이 서점을 물려받았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마냥 흐뭇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일을 물려받았을 때는 그냥 순리인가 싶었는데, 큰애의 말을 들으니 뭔가 마음가짐을 달리하고 하는 말 같아서 ‘나보다 낫다’ 싶었다.

뭐 계획이라는 건 언제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로서 잘 해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도와줄 생각이다.

-박세진 대표가 즐겨 읽는 책, 독서에 관한 팁을 준다면?

나는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김훈의 ‘남한산성’을 좋아한다.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즐겨 읽고 박완서님의 ‘친절한 복희씨’, 홍차에 관한 실용서 ‘블랙 티’도 재밌게 읽었다.

따로 독서법은 없다고 본다. 다만,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 있듯, 자기한테 잘 맞는 책이 있다. 성별, 전공, 취향에 따라 자신이 가장 궁금하고 관심 있는 분야, 관심 있고 호기심 있는 책을 읽으라고 하고 싶다.

특히 아이들에게 맘껏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고르게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게 되면 자신만의 고유성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학생들, 성인들 할 것 없이 의식이 확장되고 생활이 풍요할 거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말 한마디 한다면?

오랜 시간 함께 해주신 고객과 시민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신촌에 오시면 한 번씩 들러주셔서 요즘 무슨 책이 나왔나 둘러보고 가셨으면 좋겠다.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이지만, ‘책’처럼 좋은 친구, 좋은 선물은 없을 것 같다. 좋은 책을 많이 알리는 게 우리 서점의 가치다. 많은 분들이 책을 가까이하고, 친구처럼, 선물처럼 늘 소중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필로그

오랜 친구이지만 한자리에 앉아 책과 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말하는 내내 신나서 오늘의 서점이 있기까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박세진 대표에게서 과연 우리가 함께 지켜가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봤다.

물론 박 대표에게 서점은 사업이고, 생계수단이지만 그 이상을 넘어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책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 그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 책을 비롯한 문화를 사랑하고 향유하려는 노력.

신촌 문학의 거리 초입에 위치해 있는 ‘홍익문고’가 100년, 200년 오래오래 그 자리에 남아 앞으로 우리가 ‘홍익문고’에 얽힌 많은 이야기와 추억거리를 쌓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영주 방송작가  webmaster@k-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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