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에서 보람 있던 일 중의 하나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된 북관대첩비를 우리나라로 반환해 달라고 제일 먼저 횃불을 든 것이다. 그 시작이 울려퍼져서 한 30년 뒤에 결국 큰 열매를 맺게 된 일이다. 이렇게 시동을 건 이후 온 나라의 호응이 일어나고 정부가 나서고 북한의 합의를 받아 일본을 압박한 결과, 오랜 시간 끝에 결국 그 비를 원 위치에 도로 세우게 되었으니 나는 혼자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이 대첩비의 비문에는 임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왜군을 상대로 7전7승의 대첩을 거둔 농포공의 함경도 의병활동이 새겨져 있다. 일본은 이 대첩비가 못마땅한 존재였던 것 같다. 일본 무사의 대표로 숭앙받는 가등청정의 패퇴사실을 덮어 온데다가 이를 부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북관대첩비는 남북합작으로 해외 문화재 국내 반입에 성공한 첫 케이스이다. 영광스러운 조상의 승전비를 찾아온 자부심과 보람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농포공의 임진왜란 영웅담과 희생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농포공 이야기는 우리 후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거룩한 신화였다. 내가 소학교 저학년 시절이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로부터 농포공의 비석이 일본 동경의 상야(上野) 공원(장소는 와전이었다)에 있다고 하더라는 말과,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당시 나는 그 비가 무슨 비인지는 잘 몰랐지만 조상님의 거룩한 비석이란 것만 꽂혔다. 그것이 우리 가문의 것이며 우리 보배인가보다 라고 받아드려졌다.

▲ 1979. 필자가 대첩비 옆에 서서.

그런데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비석의 첫 소식이 나에게 날아왔다. 문교부 사회교육국장 당시 1978년 초의 어느 날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崔永禧 선생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여보 정 국장, 당신 할아버지 비를 찾았답니다. 방금 동경서 최서면崔書勉씨 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어제 아침에 아들 데리고 산보 나갔다가 야스쿠니 신사에서 조선 비 같은 것이 있어 자세히 보니 북관대첩비였대요.” 나는 즉각적으로 “앗, 그 할아버지 비로구나”하고 “우리집안 것” “내 것”이라 생각하면서 일본의 최 선생께 전화를 걸어 상세한 내용을 들었다. 최서면 선생은 당시 동경 한국연구원장으로 활동 중이어서 해외 교포 교육과 해외한국학 연구비 보조 등으로 우리 국과는 공무상 긴밀한 관계에 있던 친밀한 분이다. 또 최영희 선생은 국사학자인데 어느 식사자리에서 농포 할아버지 자랑을 한 일이 있던 터라, 이런 전화가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뒤 1978년 4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이 북관대첩비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이것이 그 비가 한국에 공개된 첫 기사였다. 뒤에 알고보니 이 기사는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허문도(許文道)기자(뒤에 문화공보부 차관)가 특보한 기사였다.

▲ 일본이 설치한 대첩비의 원 모습.1905년의 약탈 시, 碑帽와 碑臺는 버리고 碑身만 히로시마(廣島) 경유 동경으로 옮김. 그 후 현지 잡석으로 비대 비모를 꿰맞춰 갖춤. 이후 약 80여년 간 이 모습으로 서 있었음.

나는 즉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반환」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 에너지는 어린 날에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은「농포공」에 대한 존경심의 폭발이었다. 바로 해주정씨 대종친회(서초동)의 정채섭鄭采燮회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급히 반환운동 개시를 발동 걸게 하였다. 당시 종친회장은 공무원 재직시에 내가 진주에서 서울로 전출시켜준 인연으로 특히 가까운 사이였다. 누구와도 상의한 일도 없이 당장 돌려받아야 한다고 어찌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연고권도 없는 남한의 후손 밖에 아니면서 자기 물건 찾는 것처럼 어깃장 주장을 서슴없이 들고 나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피의 사주를 받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종친회장 정채섭 종손 정규섭鄭奎燮 그리고 나 정태수鄭泰秀 3인 연서로 문화공보부장관 앞으로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밥상머리교육이 없었으면 반환이라는 강수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반환이란 외침이 솟구치지 않았으면 그 뒤의 운동도 비석의 이동도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작 비석을 잃은 북한에서는 미동도 없는데 남한에 사는 의병장의 아득한 후손 하나가 내꺼라 외쳐대고 그 파도가 각계의 공감을 받아 노도로 변해 나갔다.

탄원 내용은 그 비의 주인공 정문부장군의 후손이 모두 진주에 살고 있고(애써 연고지는 거론을 피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를 내린 사액 사당인 충의사忠義祠가 건축 중이니, 그 비를 반환 받아 진주에 옮겨 세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원래 문화재에는 원 위치 복원원칙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후손에게 돌려주어 충의공 사당 앞에 세우게 해달라는 탄원이었다. 이 청원은 정부에서 주일 한국 대사관을 거쳐 일본 외무성에 도달되었다. 주일 한국 대사관에는 교육관실(문교부 문화부 사무 분담)이 있다. 그 당시 수장이 문교부 동료인 황철수黃哲秀 교육관(뒤에 국회의원)이었다. 그 분을 통해서 그 탄원서의 처리경위를 바로바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일본 측은 그 비의 원 위치가 북한이니, 갈려면 북한으로 가야지, 남한에 비를 넘겨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로서는 대첩비는 일본에서 찾아와야겠지만, 남북이 왕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에 넘겨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러니 반환 전망은 사실상 답답한 편이었다.

그 후 나는 대학교육국장으로 옮긴 뒤, 일본에 간 기회에,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였다. 무리하지만 직접 반환교섭을 행동으로 옮겨본 것이다. 지나치게 용감한 행보였지만 답답하여 그냥 앉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문교부와 일본 문부성文部省은 해마다 2~3명씩 교차상호초청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나는 이 시찰단에 끼어 도일하여 그 일정 속에 틈을 내어 혼자 일본국 당사자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먼저 일본 외무성 아주국장을 방문하여 의병장 사당 옆에 세울 것이니 대첩비를 반환해 달라고 구두로 요청하였다. 용건은 방문 전에 미리 통보되어 있었으므로 답은 이미 준비된 형식적인 것이었다. 거절이었다. “일본은 한국 보다 정부 힘이 약함을 이해해 달라. 정부가 법인이나 개인 재산의 양도여부를 함부로 결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일본이 더 민주국가라는 함의를 품기는 예상했던 답이었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방문은 정중히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아주국장은 외무성 사무관 한 사람을 앞에 태운 외무성 관용차를 내 주었다. 그걸 타고 침략의 A급 전범戰犯의 위패를 봉안한 야스쿠니 신사엘 도착하여, 그 곳 부사장副司長인 콩쿠지(權宮司,藤前勝重 야스쿠니의 부사장, 사장은 宮司)를 만났다. 대담은 장시간이 걸렸다. 대첩비의 주인공인 의병장 후손과 비석을 노략질해 간 강탈자의 후손이 마주한 자리였다. 상대편은 장시간 내 말을 들으면서 나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불만스런 투로 “우리가 70여 년 동안이나 보존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내어 놓으라고만 하십니까?” 하였다. 참으로 주제넘고 얄미운 반격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을 표할 자리인가. 두 사람의 대화에는 간극과 꼬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국 권 궁사는 자신을 한국에 초청해 주면, 비 세울 곳에 가본 후에 검토해서 대첩비를 돌려 드리도록 노력은 해보겠다는 극히 가식적인 언사로 이야기를 끝내고 말았다. 얄미운 강아지가 생선을 물고 마루 밑으로 도망가는 격이었다.

야스쿠니에 있을 때의 북관대첩비 조소앙선생 최서면선생

그날 찾아본 북관대첩비는 참으로 후손으로서 자괴감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너무나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신사 정면에서 우로 또 우로 꺾으면 2층짜리 비둘기 집이 있고, 그 옆의 나무 숲 속 어두컴컴한 담 옆 숲속에 서 있었다. 비신碑身만 빼앗아 갔으니, 일본 현지의 모양 없는 시커먼 돌로 비대碑臺를 받치고 더러운 돌로 비모碑帽가 씌워져 있었다. 음습한 응달에 거미줄과 모기가 날고 비들기 똥을 둘러쓰고 있었다. 외무성 지시가 없었으면 차마 공개하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나는 농포할아버지를 만난 기분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비석 앞에 엎드려 재배하고 비를 만져 보았다. 동행한 콩쿠지가, “나는 소년시절 조선 서울의 조선신궁(朝鮮神宮) 사제직司祭職 으로 수년간 근무한 일이 있다. 신궁 사제직이 쓰는 모자와 입는 옷은 옛날 조선옷(도포)에서 배워온 복식으로 생각된다. 지금 정국장이 절하는 걸 보니 우리 사제들이 신에게 절하는 것과 거의 같다”고 말하였다. 이 비는 훨씬 뒤에야,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와 사진을 찍어가고, 그 모셔진 상황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음습한 자리에서 옆으로 옮기고, 각목으로 덮개를 질러, 반환 시까지 잘 보존된 것같이 모양새를 꾸몄다 한다.

최서면선생이 야스쿠니신사를 찾아가, 이 비를 발견한 경위는, 구한말 동경 한국인 유학생회 잡지인 대한흥학보 제5호(1909년 7월)에 소해생嘯海生라는 아호를 써서 게재한 조소앙(趙素昻, 본명은 趙鏞殷)선생의「함경도 임진의병 대첩비문」이란 제목의 글을 본 데서 비롯된다. 조소앙 선생은 일찍이 야스쿠니 신사 후원에 북관대첩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이 비의 원문을 전문 소개하면서, “오호통재라”하며 통탄의 소감을 적었다. 선생은 당시 조선이 합병되기 직전 구 한국 일본 유학생으로 도경에 있으면서 이 전승비를 보고 탄식의 글을 쓴 것이었다. 그 비는 일본으로 끌려온 지 5년 만에 조소앙선생을 만난 셈이 된다.

조소앙 선생 다음으로 이 대첩비를 찾아본 제2 발견자는 익명의 이 씨라는 분이다. 1926년의 동아일보 기사(9월 19일자)에는, 그 해 9월 16일에 이생(李生이라 익명)라는 분이 야스쿠니 신사엘 가서 북관대첩비를 확인하고 자세히 보려다가 일본 헌병에게 금지를 당했다는 것과 그 당시 이 비석 옆에 선 나무비에 「이 비에 대첩이라 했지만 사실과는 전연 상반되니 이 비를 믿지 말라」고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 써놓았더라고 썼다. 이 목비는 그 뒤에 없어져 더는 그것을 본 사람이 없고 그 흔적도 없어졌다. 이 기사는 "임명臨溟에 있던 비를 음취陰取해다 야스쿠니에 갖다 놨기에 이를 널리 알리는 바이니 모두 기억해두자"고 부연하였다. 이 씨는 이 소중한 비가 일본에 의해 혹시 없어질까 봐 안타까워 한국 사람에게 알려 달라고 22년 만에 동아일보에 실렸던 것이다. 결국 야스쿠니에 있는 북관대첩비의 첫 발견자는 조소앙 선생이고, 두 번째는 이 선생, 세 번째 발견자는 최서면 선생인 것이다. 따라서 이 토왜비(討倭碑)는 대한제국 때에 잡혀오고, 그 첫 발견은 이등방문(伊藤博文)의 통감정치기에, 두 번째 발견은 일제 식민지기 중반에, 그리고 세 번째는 대한민국 건국 후 30여년 후의 일이었다.

▲ 한국 반환 때, 한국측에서 ㅂ모와 비대를 복원하여 국내로 운반하 였다. 비신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 모습이 북한으로 갈 때의 모습이다(2005).

하여간 1978년에 북관대첩비 소식이 국내 신문에 보도 되고 우리 농포공 후손들이 반환탄원서를 제출하자, 한참 후 1980년대 중엽부터 잇따라 광주, 부산, 이북5도청(함북지사와 길주 군민)의 반환운동, 한일 불교계의 반환운동 등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나도 여러 인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신문기자 인터뷰도 더러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하나는 삼중三中스님을 만난 일이다. 1990년에 삼중스님(재일본 한국 문화재와 귀무덤 초혼행사 등의 많은 일을 한 스님)에게 반환운동을 제안하였더니, 스님은 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일본 불교계와 연결하여 추진하겠다면서, 아주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날 때는 마지막 수단으로 밀반입이라도 해보겠다는 열의를 보였다. 참으로 단호한 분이었다. 나는 스님의 열의에 감사했으나, 밀반입은 도중에 분실되거나 남해에 수장될 가능성도 있어 곤란하다는 의견을 말하였다.

두 번째는 대첩비 반환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본 일이다. 1990년대 어느 날 나는 독립기념관 관계 국사학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 “정 총장, 왜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은 하는 거요? 안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 대첩비가 일단 한번 반환 되고 나면, 단 한번 왁자지껄하다가 그 후에는 뉴스거리도 안 되고 관심도 사라지니, 그냥 거기 두고 1~2년에 한 두 번씩 세계에 선전되게 하는 것이 이를 알리는 데는 더 효과적이 아닌가요. 동경은 우리 현관이요 세계의 요지 입니다. 거기다 둔 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네, 일본이 러․일 전쟁 때 남의 나라 문화재를 강탈해 여기 세웠네 하고 자꾸 들먹거린다면, 그게 더 그 비석이 살아서 생동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요.?” “또 반환되어 한국에 있으면 그래도 다행이겠지만, 원위치인 북한으로 가버리면 아무도 못 보고 연구도 끝나고 묻혀버리는 것 아니요?” 이 말들은 일면 옳은 말이기도 했다. 남북이 꼭 닫힌 지금 일본에 가기보다 오히려 북한에 가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런 대화가 있은 후, 나는 대첩비 반환이 이로운가 해로운가 하는 회의감에 빠진 적도 있다.

많은 운동 끝의 마지막에 초산樵山스님이 나서서 반환운동이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초산과 카키누마 센신(枾沼洗心) 두 스님은 의정부 송산의 충의공 묘에 와서 참배하고 반환운동발대식을 가졌다. 나도 종중 회장으로서 그 분들을 맞이하고 행사에 참석했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그 후에 정치인과 정부(문화재청, 통일부, 총리)가 나서서 해방 6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반환운동을 추진한 점이다. 나는 종친회 이름으로 “그 비를 의정부 송산 충의공 묘 앞에 안치해 두었다가 통일 이후에 원 위치 길주(지금의 김책시)에 보내자고 건의서를 제출했으나 묵묵부답 북한행을 서둘렀다. 결국 북한대첩비는 환국하고 여러 국내행사를 거친 후, 충의공의 묘 앞 사당 충덕사(忠德祠)에서 귀환 고유제를 지내고 2005년 3월 1일 개성에서 인도인수식을 마치고 길주에 원상복귀하게 되었다. 남북통일의 그날이 기다려진다.

鄭 泰 秀의 약력

1931생(85세), 진주 생
일본 쓰쿠바(筑波)대, 교육학박사
문교부 국장
1, 종중 탄원서 주동 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문교부 차관
서울교육대학교 총장
대진대학교 총장
해주정씨 송산종중 회장
1, 忠德祠 신축 2,정부 표준 충의공 영정 봉안
3, 유림 秋享祭 개시
해주정씨대종친회 20 21대 회장
시조시인협회 명예고문 (현)
 

정태수  k-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오늘의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