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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통일의 아이콘이자 추앙의 대상으로 평가 받아남침 알고도 ‘미군철수 후 통일정부 수립 외쳐’
마연옥  |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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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05  16: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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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선생(1949.6)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던 인물로 1919년부터 대한민국이 광복할 때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지도자이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경주 김씨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조 역신(逆臣)인 김자점(金自點)의 후손으로서 , 멸문지화를 피해 해주(海州)에 숨어들어간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마의상서(麻衣相書)를 통해서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음을 알고 늘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김구는 17세가 되던 1894년에 ‘상놈으로 태어난 것이 한이 되어’ 동학에 입도했다.
이러한 점이 왕손을 자처하는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늘 주눅들게 만들었다. 김구는 이승만과 같은 황해도 땅이라는 점에서 끈끈한 연을 맺고 있었으며 한 살 위인 이승만에게 깍듯이 ‘형님’으로 대했다.
김구는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과도 만난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峯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했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했다. 그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된 후 7월 인천 감리영에 이감됐다.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지만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됐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했다. 그가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승려 생활을 한 것은 1898년 가을부터 1899년 가을까지였다. 도피 중에 하동 쌍계사에 들른 것이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그 후 그는 갑사에 들렀다가 다시 공주 마곡사를 찾아가 승려가 됐다.
이는 김구가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설득으로 중이 되었을 때, 불교의 오묘한 뜻에 감동되어서라기보다 다만 쫓기던 몸을 절에 의탁해 잠시 숨기고자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얼마 동안 김구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28세 되던 해에 최준례(崔遵禮)와 결혼했다. 준례는 천주교의 세례명인 줄리아의 한문식 표기였다는 점에서 아내는 천주교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구도 한 때 상동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 김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1919.9.17)

김구는 3.1 운동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 잇단 지도층들의 분열로 고초를 겪고 있던 임시정부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한인애국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본의 주요요인들의 암살과 테러를 시작한다. 결국 두 젊고 패기넘치는 한국인, 이봉창과 윤봉길에 의해 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폭탄이 많은 일본 고위장교들을 사살했다 하더라도 광복을 하는 데는 그리 큰 공이 되지 않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일본이 그것 때문에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구는 의거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잠시나마 해이해졌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각성시키는 데도 성공했지만 일본이 그것 때문에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사건 이후로 일본은 더욱 더 조선인 탄압정책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김구라는 성역에 조금씩 비판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민족주의 우파 보수에게도 김구는 추앙의 대상이다. 동시에 민족주의 좌파에게도 통일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 김구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기념 (1940.9.17)

김구,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 아니다

“김구 선생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는데 반대하셨기에 건국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것은 맞이 않다”
이인호 KBS 이사장은 2014년 10월 22일 미래창조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렇게 말해 파문이 일었다. 당시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언론에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에 반대했다고 밝혔는데 이게 사실이냐’고 이 이사장의 역사관을 문제 삼자 나온 대답이었다.
이에 인터넷은 갑을논박으로 뜨겁게 달궈졌다. ‘김구는 분단을 원치 않았을 뿐이라는 주장이 대부분이었으나 김구가 왜 건국유공자가 돼야 하는가에 대한 반박논리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김구는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을 같은 것이다’고 180도 전환한 단정수립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김구의 ‘단정불가론’은 또다시 바뀐다. 한민당 창당의 주역이자 정치부장인 거물 장덕수가 김구의 추종자들로부터 암살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민당 초대 당수였던 송진우를 암살했던 배후에 김구가 있었던 터라 이 사건은 당시에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장덕수는 미소공동동위원회 문제로 김구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김구는 미소공위에 한국측이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참가해 떳떳하게 한국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김구가 지도하는 한독당과 한민당 간의 연대를 놓고 장덕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장덕수는 김구에 반대해 이승만의 단정 수립 노선에 무게를 실었고 그와 연대하려 했던 것이다. 김구는 이전에도 여운형을 비롯해 송진우를 암살한 이력으로 하지 사령관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던 터였다. 하지만 하지 중장은 이 문제를 미군정 검찰로 넘겼다. 김구는 살인교사로 미군정 법정에 서야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구명요청을 햇으나 거절당한다.
이때까지 김구는 이승만에 대해 ‘우남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지만 장덕수 암살로 이승만과 틈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미군정 검찰의 라만 검사는 김구를 살해 배후범인으로 기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한 방북’을 겴심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김구가 미군정 검찰기소를 면하려는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 김구 가흥피난시기의 임시정부 요인 (1936)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이외에도 김구는 한민당 당수 송진우를 암살했던 배후로서 하지 미군정 사령관에 불려가 경고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신탁에 반대해 미군정을 접수하자는 파업을 일으켰다가 하지로부터 추방 압력을 받고 파업을 중지했다. 김구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미군정이 자신에게 협상을 하리라 여겼지만 매번 돌아오는 것은 단호한 배격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 대한 반감은 커져갔고, 김구는 그해 4월 북한행을 강행하게 된다.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1948년 4월 19일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자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학생들이 김구의 경교장 앞에 드러누웠다. 이때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 와서 북행길을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철승 등 청년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가 북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북한에서 김구는 기이한 태도를 보였다. 김구는 김일성의 손을 잡고 “제자 죄를 지었습니다. 통일을 이루시거든 그저 황해도에 과수원이나 하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과거 평양에서 김일성과 공산주의 세력에게 수류탄을 투척 테러를 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철승 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는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김구는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됐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 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된다.”
김구는 북행을 다녀온 후 ‘남북한에서 외군철수 후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으로부터 ‘외군이 철수해도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내세웠다. 그것이 김일성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어리석은 판단이었음은 1950년 6.25로 증명됐다.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 대표인 유어만 공사의 1948년 7월 11일 김구 면담 기록에 의하면 김구는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지시에 의해 남침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새로운 증거들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외국철수를 해도 전쟁은 없다는 김일성의 말을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남한에 그대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기념 (1945.11.3)

대통령 간접선거, 김구 6.6% 이승만 92.3% 득표

이러한 김구의 무리한 북행은 그의 지지자들을 이탈하게 만들었다. 남북한 협상과 북행으로 정치적 쇠락의 길을 갔던 백범 김구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에서 실시한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197명의 투표 가운데 13표인 6.6%를 득하는 데 그쳤다. 이승만의 득표율은 92.3%였다. 이후 김구는 칩거에 들어갔다.
백범 김구는 용기 있고 유능한 항일투사였지만 외교와 치세에는 현명한 정치가는 아니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김구에 대해 이승만은 “곡괭이를 들려주면 어디든 가서 때려 부수겠지만 사람들을 달래는 정치는 못한다”고 말했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으로 암살됐다. 안두희는 백범을 지지하고 존경하던 한독당의 비밀요원이었다. 많은 이들이 김구 살해를 이승만의 사주로 몰아갔지만 이승만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당시 안두희는 검찰에서 ‘김구가 군대를 자신을 위해 자의적으로 사용하려 하기에 응징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의 쿠데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전히 백범 김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민족주의의 리더이자 민족정신의 상징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 대해 새롭게 평가해야 될 시점이 아닐까.
 

마연옥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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