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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독립 이승만과 무장투쟁 김구의 다른 노선두 사람, 대결 구도로 흘러…역사적 재평가 이루어져야
마연옥  |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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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05  16: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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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역사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 앞에서 좀 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역사에 대한인식이 시대에 따라 왜곡되어졌다면 바른 역사관과 건강한 국가토양을 후세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올해는 역사의 한 장으로 기록될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나라를 빼앗겼던 1910년 경술국치로부터 105년, 1945년 해방과 분담으로부터 70년이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두 거두인 이승만과 김구는 발자취가 너무 깊어 이들에 대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한국 현대사의 재구성이 어려울 정도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서로 다른 노선을 걸었다. 이승만은 외교우선주의를 택했으며 김구는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이들의 대한 역사적 평가가 마치 대결 구도처럼 흘러왔다. 그동안 독립과정에서 외교노선을 폄하하고 무력투쟁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왔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 보는 교과서인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김구를 애국 독립운동가로, 이승만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쇠퇴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평가 절하하고 있다.
백범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어나감과 동시에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구는 1919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이 광복할 때까지 지도해나간 광복 전의 위대한 지도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승만의 업적 또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이승만에 대해 외교적 업적을 재조명되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승만이 한국독립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했다. 가문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1894년 이승만은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조선어 교사가 되었으며, 1896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담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대표로 활약하다가 1899년에 투옥되었는데 이때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당시 그의 궁극적 관심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애국자로서의 반일이 아니라 반러시아주의였다는 것은 눈길을 끈다.
1904년 8월에 출감한 이승만은 11월에 도미하여 하와이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1907)했으며, 컬럼비아대학과 유니언신학교에서 강의를 들었고,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 1910)’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학력은 미국인도 쌓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다. 당시 그는 스린스턴대학 총장이었던 윌슨(W. Wilson)을 만나 지대한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때 탁월한 국제정치 감각을 익히게 된다.

   
 

승만의 외교노선 본격적으로 빛 발한 ‘카이로선언’

이승만의 외교적 성과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선언은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 정치학과의 교수이자 자신의 박사논문심사 위원이었던 우드로 윌슨과 서로 농담을 하며 지낼 정도로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그는 대통령에 오른 윌슨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 1차 세계대전이 민족 간 대결로서 민족과 국가의 일치가 세계 평화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민족 국가와 민족자결의 의의를 역설했다. 다민족국가의 대통령인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데는 이승만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할 것임을 미리 고지 받고 송진우, 김성수 등 국내 민족지도자들에게 알렸다. 그는 밀서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를 보내는 한편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듯을 피력했다. 한민족이 식민지를 겪은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독립선언(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 3.1 운동 등)을 한 데는 이러한 이승만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뒷받침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해나갔다. 그는 대한민국 공채를 발행해 판매하고 미국 내 한인들로부터 모금을 해 임정에 보냈다. 그것은 임정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임정이 국제적인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해 미국 정부를 적극 설득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외교노선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것이 1943년의 카이로선언이다. 이승만의 주도적 노력으로 카이로 선언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조항이 삽입되는 쾌거를 올렸다. 카이로 선언이 더 의미있는 것은 다른 식민지 국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한국의 독립만을 규정했다는 점이다. 그간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조항을 삽입한 것은 중국 장제스의 의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측이 카이로선언을 기초하였으며 이승만이 여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 임시정부 장악하려 했지만 이승만과 김구 저지
이승만은 반공 반일주의자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1923년에 쓴 글(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에서 이미 공산주의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만들어낸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주목하면서 공산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는 기업가를 없애면 경제발전의 핵심인 혁신이 사라진다는 관점을 고수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문제점으로 사유재산을 없애면 부의 근원인 근로의욕이 쇠퇴한다는 점과 지식인을 없애면 문명이 쇠퇴한다는 점도 꼽았다.
1933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후 소련을 방문해 소련 당국에 의해 하루 만에 추방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이승만이 전 생애를 통해 반공주의를 일관되게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는 종종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는 역사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기만과 폭력을 행하며 소수가 권력을 획득하여 다수를 노예로 만드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현실 인식에서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김구는 테러리즘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엄혹한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성숙한 민중의 육성이 불가능하는 제약이 따랐다. 김구는 3.1운동에서 본 바와 같이 민중적 지지 기반이 취약해 봉기나 지지에 의해 국가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윤봉길(尹奉吉)이나 이봉창(李奉昌)의 경우처럼 순교자적 희생정신으로 무장된 개별적 테러리스트에 의존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테러리즘은 ‘자금이나 훈련이 부족하고 적군의 엄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정규적이고도 조직적인 투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순교자적 우국심으로 무장된 개별적 투사가 단독의 힘으로 적군에게 무장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명분과 기개를 드높이고 적군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투쟁 방법’을 의미한다.
이처럼 김구가 테러리즘에 몰두한 것과는 달리 이승만은 외교우선주의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민족주의 노선으로 이끌어가는 데는 힘을 모았다. 수차례에 걸쳐 공산주의자들이 임정을 장악하려 했지만 이승만과 김구는 이를 저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끄는 두 축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대응했고 서로 협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1942년에 김구는 중국의 국공합작의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원봉 등 좌익들과의 합작을 수용했다.
이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했다.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국무성, 재무성 등 관계로 진출했으며 할리우드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이승만이 귀국하려 했을 때 미 국무성은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적이 없었다. 국무성은 이승만에게 과거에 발급했던 여권마저 취소해 버렸다. 한 달 이상을 지체하던 이승만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에게 귀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평소에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맥아더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고국으로 마침내 돌아올 수 있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공산당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이승만 만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이승만이 국내로 돌아왔을 때 국내 좌익들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선포되어 있었다. 박헌영과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데 이어 재빨리 인공을 선포하면서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이들에 의해 이승만은 인공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좌익들의 통일전선전술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거절했다.
이승만은 소련이 북한지역에 이미 분단국가를 세웠음을 지적하면서 공산당과의 합작은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드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승만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울 만큼 그를 혐오했다.
하지는 좌파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중도파를 표방한 김규식과 중도좌파 노선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 중장은 이승만과 김구를 매우 골치 아픈 존재로 치부했으며 온갖 공식 조직에서 배제했다.
이승만은 이러한 온갖 고난을 뚫고 한반도 남쪽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사회주의가 시대의 대세처럼 확산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중국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이 대륙을 장악했다. 곧이어 6.25가 발발했다.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군을 끌어들이고 국민들을 반공주의로 단합시켜 이들을 격퇴했다.
1954년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미 의회연설을 하면서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설파했다. 의원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지지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공산당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이승만 만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마연옥  noji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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