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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鄭文孚)-(2)남충무 북충의(南忠武 北忠毅)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인물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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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15  14: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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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선생이 이끌던 의병에 의해 함경도 왜군을 평정될 당시 ‘쾌지나 칭칭 나네’란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가등청정 물러가니 기쁘다는 ‘쾌재(快哉)라 청전(淸正) 나가네’하고 춤을 추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노랫말이 ‘쾌지나 칭칭 나네’로 변해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함경도민들이 왜병에 노략질에 해방되자 장구와 꽹과리로 춤을 추면서 노래한 것이다.

정문부 선생의 함경도에서 의병활동을 삼난평정(三亂平定)이라고 한다. 정태수 전 문교부사회교육국장이자 전 해주정씨 종친회장은 “여기서 ‘삼란평정’이란 세 가지 난리를 다스렸다는 것”이라며 “첫째는 가토 키요마사의 2만3천 왜병이 남쪽에서 관북으로 쳐들어온 임진왜란, 둘째는 오랫동안 이반되어 쌓여온 관북의 내부민심이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의 반역으로 여러 곳에서 들고 일어난 부역반란(附逆叛亂), 셋째는 이러한 틈을 탄 북쪽 오랑캐가 무리지어 수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양민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한 오랑캐란을 평정한 것을 말한다”고 전했다.

특히 정태수 전 회장은 기이하게도 왜장 가토와 의병장 농포공은 같은 28세로 동갑내기였다고 전했다. 따라서 무인과 문인의 대결인데다, 장창(長槍)과 단창(短槍), 조총(鳥銃)과 농기구의 대결로 직업적인 칼잡이와 농민군과의 전투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는 것이다.

   
 
길주 장평 전투와 쌍포 부근 전투에서 승전고 울려

경성에서 승리한 의병군은 10월21일 남쪽인 명천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정문부 선생은 동관험사 이응성에게 군사 7백을 주며 경성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선생은 군사 천 여명을 거느리고 명천현에 나가서 진을 치게 되는데 여기서 길주목사 정희적과 유성찰방 최동망과 합세한다.

이때 적은 길주성내에 천여 명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길주남쪽 80리인 영동관책성에는 따로 3백여 명을 두어 영동과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왜병들은 십여 명 내지 백여 명 내외로 떼지어 다니면서 민가에 들어가 약탈과 살상을 일삼아 그 횡포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문부 선생은 이러한 적의 무리들을 단번에 척결하기로 결의한 후 진군의 북을 울리게 하자 경성 남쪽 일대는 전마의 철제소리가 요란했다. 10월 30일 이른 새벽.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이 듯 불어 닥쳤다. 적병력 수천 여명은 깃발을 앞세우고 길주(吉州) 성문을 나와 해정가성리(海汀加城里)쪽을 향해 진군했다.

특파대장(特派大將) 원추서(元忠恕)가 곧 이 상황을 본군에 보고했다. 그러자 각처의 복병장들은 그의 부하 장병을 보내어 매복해 귀로를 요격(要擊)키로 했다. 적들은 민가를 불태우고 재물과 가축을 노략질했으며 부녀들을 잡아서 끌고 이날 오후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전투에서 맨손으로 인긴 버릇이 있어 약탈한 물건들을 말에 가득가득 싣고 별로 경계도 하지 않은 채 길주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원충서가 날랜 군마를 거느리고 급습하여 선두에서 전진하는 적 2명을 번개같이 네니 적은 당황하여 앞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승승추격(乘勝追擊)하여 가다가 적의 대병력을 장평석령에서 만나게 된다. 이곳은 장평석현 또는 돌고개라는 곳이다. 원충서는 그의 주졸로 하여금 산에 올라가 험요(險要)를 등지면서 맞도록 했다. 지세가 험준해 방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자신은 정예한 기병을 이끌고 후방을 경계하면서 일부러 후퇴하였다.

한편 길참지에 잠복하고 있던 복병장인 방원만호(防垣萬戶) 한인제는 부하 3백명을 이끌고 급히 달려가 원충서군과 합동하여 적을 총공격했다. 아군의 기습에 놀란 적은 4백 여명을 앞세우고 장수 5명이 중심이 되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불시에 기습을 당한 탓인지 조총도 변변히 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아군은 이틈을 이용하여 매복한 궁수들로 하여금 적장을 차례로 쏘아 죽이게 했다. 마지막 남은 적장 한명이 붉은 기를 꽂고 홀로 진중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한인제는 화살로 거꾸러뜨렸다.

장수가 모두 쓰러지자 왜병들은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군은 좌우에서 협공하여 닥치는 대로 쏘아 죽이고 베어 죽였다. 이날따라 날씨가 매우 춥고 북풍이 뼈에 사무치듯 스며들었다. 의병들은 원래 추위에 익숙했지만 왜군은 그렇지 못한 까닭에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전투는 해질녁까지 계속됐다.

위로는 장령에서 아래로는 졸병까지 맹렬히 공격하니 화살은 빗발같이 퍼붓고 철기를 몰아 적진을 유린하였다. 적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지상에서 아군들의 공격을 막으려 악전고투하다가 막판에 가서 길주성 동쪽에 있는 장덕산으로 기어 올라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고경민(高敬民)이 부하장병을 이끌고 산위를 차단한 다음 정예군을 풀어서 지 적들을 포휘해 섬멸키로 했다. 아군의 장사들은 도망치는 적을 따라가서 그 좌우로 에워싸고 무찌른 다음 직접 산으로 쳐 올라가면서 십여 리를 추격해 적들을 참살했다. 활에 맞거나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잔등에 10여개나 화살을 맞고 숨진 적병도 있었다.

   
 
이 전투로 인해 적에게 끌려간 남녀백성과 말 100필을 포함한 가축을 모조리 되찾았으며 그 밖의 노획품은 다음과 같다. 군기20여기 환도10백개 창16개 총탄645개 갑옷56벌 투구8개 총간26개 화약통15개 등 우리 의병군은 적의머리 8백여급을 베었는데 이들의 왼쪽귀 825개를 잘라 임금에게 전투결과를 보고했다.

길주성에 있던 적들이 명천(名川) 가부지(加富地)라는 곳에 약탈하러 나왔다. 이곳에는 이배라는 사람이 있는데 집이 부자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만들고 술을 많이 담구었다. 적병들은 이 술을 마음껏 마시고 대취하여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노략질을 해댔다. 이에 허진과 김국신은 ‘적이 돌아갈 때쯤인 저녁녘에 석령(石嶺)을 넘어 설 것’을 대비해 수하 병사들을 몰래 풀어 잠복시켜 놓았다. 이곳은 길이 좁고 험해 복병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과연 적은 저녁 때 술이 취한 채 석령을 넘으려 고개 길을 오르고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복병들이 일시에 일어나서 겹겹이 에워싸고 덤벼드니 적은 혼비백산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심지어 취기가 심한 자는 병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국신과 허진은 선두에 서서 이들을 무찌르니 술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여 코를 찌를 정도였다.

이는 적은 식량을 구하려 민가를 돌아다닌 것으로 뜻이 전투에 있지 않고 약탈에 있었기 때문에 아군에게 추풍낙엽 떨어지듯 패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군은 추위에 적응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에도 능통했기 때문이다. 반면 북구주(北九州)지방에서 침략했던 가등군은 방한 장비를 경시하였고 지리에도 미숙했다. 이 때문에 동상자(凍傷者)가 속출할 정도였으니 대패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북진중인 왜군을 격퇴

10월30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왜군은 길주성문을 굳게 닫고 가만히 있었다. 의병군은 성을 포위한 채 40여일을 보냈다. 12월에 접어들자 정문부는 병력 3천여명을 총동원해 길주성을 치기로 했다. 적은 4백 여명의 병력을 모조리 성두(城頭)에 내세우고 조총과 화살로 대응하니 사상자만 늘어갈 뿐 성을 함락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정문부 장군은 길주성은 견고한 성인지라 갑자기 공격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해 공격 방책을 바꾸기로 했다. 병력을 구분한 다음 몇 리 성 밖 4~5개 지점에 복병을 설치해 두고 주야간으로 적을 감시하게 했다. 만일 적이 성 밖으로 나올 경우 일시에 포위해 섬멸하려는 작전이었다.

이때 적의 일부 병력은 마천령 밑에 있는 영동관(嶺東館)의 책성(柵城)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 병력은 해정창(지금의 성진)을 지키는 동시에 단천의 군사와 상호연락을 취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의병군은 먼저 이 책성의 적을 쳐서 후방과의 연락을 차단, 길주성을 고립시켜놓을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책성의 병력 4백여 명이 길주성과 연락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정문부 선생은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서 먼저 이 적을 치기로 했다. 아군은 적이 올라오는 길목에 숨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까맣게 모르는 적은 길주성을 향하여 북진중인 왜군에게 좌우에서 일제히 집중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당황한 적은 의병을 향하여 반격을 하려고 하였으나 지형이 험한데다 한겨울인지라 눈과 얼음으로 길이 미끄러워 오는 길을 따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본 김국신은 수십 기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했다. 의병군은 중위, 좌위, 우위 등 3위가 일시에 일어나 세 방면에서 포위 태세를 갖추고 공격을 시작했다. 김자와 한인제 그리고 김범황 등 3사람은 서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병졸들보다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조총을 겨누고 사격자세를 취하는 왜병들을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 풀베듯 베어나갔다. 칼을 쓸 여유가 없을 때에는 말발굽으로 마구 짓밟았다.

   
 
창칼로 돌진해 찌르고 말 탄 채로 짓밟아

의병군 가운데 함이량(咸以良)은 창과방패를 휘두르며 분전했고 강만우(姜萬佑)는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댔다. 그리고 박학수(朴鶴壽)는 긴창을 겨누면서 갑옷을 입고 큰칼로 덤비는 적장을 찔러 떨어뜨렸다. 이언보(李彦甫)는 어월도로 적의 보병을 베어나갔다. 이리하여 적의선봉 백여기가 뒤로 물러나자 이번엔 2진 2백여 명이 조총과 활로 일제히 대항해 왔다.

유대남(柳大男)이 말을 몰아 뛰어나갔다. 적탄으로 부상을 입은 마복(馬腹)에게 적장 한 사람이 창을 갖고 돌진해 그야말로 일촉즉발 위태로운 상황이 펼쳐졌다. 황사원(黃嗣元)이 곧 흑각대궁으로 쏘아 넘어뜨리자 유대남이 적장의 머리를 베었다. 한 대방(韓大防)은 삼지창으로 적을 찌르려다 말에서 떨어졌지만 개의치 말고 닥치는 대로 적을 격파하라고 명했다. 한정세(韓廷世)는 아군 포졸들의 뒤를 따르면서 칼로 치려는 적병들에게 활을 쏘아 쓰러뜨린 후 자신의 말을 버리고 적의 말을 빼앗아 적의 배후를 차단했다. 이처럼 적의 제2진과 아군사이엔 다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으며 의병장 정문부 선생은 북을 울리면서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적도 풀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최후 발악을 했다.

정현룡이 오명수와 이계남을 좌우에 거느리고 4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쏜살같이 적의 중앙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김천석(金天錫)은 적장으로부터 빼앗은 대도로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나가니 하얗게 쌓인 눈이 사람과 말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마침내 적은 1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적의 그림자가 멀어진 곳에 아군의 환호소리만 계곡을 울렸다. 이 기습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아군의 병력이 3천여 명이나 되어 적의 4백여 명보다 우세하기도 했지만 속전속결의 기동력을 보여준 일전이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아군 장령급에는 전사자가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장쾌한 일전이었다. 임진년12월10일 이었다.

이 전투는 비록 교전 병력이 적었다 할지라도 의병들이 경계를 넘어서 관군을 부원(赴援)하였다는 것과 적을 유출(誘出)하여 놓고 복병이 사기(四起)하여 미리 계획한 각본대로 주동적으로 적을 쳤다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 흥미진진한 전례(戰例)를 보여 주고 있으며 더구나 본역중(本役中)에서 관군이 의병을 부원한 예가 적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와 반대의 작전을 감행해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의병군은 그 뒤 길주성을 포위한 채로 계사년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성안의 왜적은 급수와 보급로를 끊긴 채로 엄동설한에 외로이 성을 지키느라 사기가 날로 떨어져갔다. 더구나 명나라 원정군이 평양성 싸움에 크게 이기고 성을 다시 탈환했다는 소문까지 들리게 되니 아군의 사기는 날로 치솟아갔다.

거짓으로 패한 것처럼 철수, 잠복한 구원군 쪽으로 왜적 유인하다

정월19일 복병장 원충서는 수십기의 복병을 거느리고 길주성 남문 밖에 잠복하면서 성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 때 적병 수백여 명이 남문을 열어 제치고 쏟아져 나왔다. 성밖에 숨어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원충노는 적을 포위 섬멸키 위해 결전을 피하면서 퇴로를 끊어버리고 일부러 모른 채 내버려 두었다. 2리 쯤 나오게 된 적장은 군사를 멈추게 하고 단기를 몰아 아군 상황을 정찰하려 했다. 이때 복병 수십 명이 고함을 지르며 활을 쏘아대니 놀란 적장의 말이 앞발을 쳐들었다. 말에서 떨어진 적장을 그대로 두고 적병들은 놀라 성안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퇴로를 차단해 섬멸하려던 의병의 계교는 실패했지만 적장을 죽였으며 이후 적들은 성 밖을 나올 염두를 못했다.

한편 마천령을 넘어 단천군에는 가등청정의 부장 가또요자가 거느리는 5백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루는 단천군수 강찬(姜燦)이 정문부를 찾아와 하소연했다.

‘단천에 있는 왜병이 제멋대로 약탈과 폭행을 일삼아도 官兵은 모두 兵卒일 뿐만 아니라 겁이 많아 손을 될 수가 없소이다. 원컨대 의병대장께서 일부병력을 나누어 이적을 무찔러주기를 바랍니다.’

정문부 선생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지금 길주 일성(吉州一城)만 하여도 성내의 적과 영동관 책성의 적들과 서로 맞대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도저히 타도에까지 병력을 파송한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단천군수의 요청이 너무나도 간절한지라 여러 장령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이때 장령들은 의견이 맞지 않고 구구절절 이견을 쏟아냈다. 길주성을 포위한 상태로 단천까지 병력을 나눠 보낼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정문부 선생은 조용히 생각해보니 길주와 책성의 양적(兩敵)은 아군에게 얻어맞아 기세가 이미 꺾여 머리를 들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거느리는 강병을 쉬게 한 채로 타도라 하여서 적을 치지 아니한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일로 보였다. 이에 선생은 응원병력을 보내기로 마음먹게 된다.

이리하여 정문부 선생은 정병2백기를 뽑아 4대(四隊)로 구분하여 지휘케 한 다음 단천으로 보냈다. 제1대장 구항, 제2대장 박은주, 제3대장 인원침, 제4대장 고경민은 정월 20일에 다신리를 출발, 산길만 골라서 남쪽으로 내려가 드디어 정월22일 단천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23일 일찍부터 의병군은 4대의 장병들이 모두 성 밖 20리쯤 되는 지점인 마흘(현단천군 파도면)에 잠복하고 당천군의 관군 30명으로 하여금 성안의 적을 유인해 내도록 시켰다. 성밖 5리쯤 되는 곳까지 관군이 접근해 싸움을 돋우자 적군 2백여 명이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별로 힘 안들이고 싸움에 이겨 오던 터라 이번에도 가볍게 여기고 뛰쳐나온 것이다. 단천의 관군은 거짓으로 패한 것처럼 철수하면서 잠복하고 있는 구원군 쪽으로 적을 유인하였다.

기고만장한 왜병은 의병군이 잠복해 있는 지점까지 끌려오고야 말았다. 그러자 복병이 일시에 뛰어나와 앞을 가로 막는가 하면 대열의 중심부를 찌르고 후방을 끊은 다음 화살을 마구 퍼부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적은 감히 저항을 하지 못하고 100여구의 시체를 남긴 채 30여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허겁지겁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달아나는 왜적들에게 화살을 쏘아대니 등 뒤에 화살을 꽂힌 채로 들어간 자도 많았다.

   
 
의병군은 잔적을 성까지 20여리나 추격하느라 죽어 나자빠진 적의 목을 일일이 베지 못했는데 단천의 관군은 뒤에 따라 오면서 숨진 적의 목을 베어 모두 자기들의 전과로 삼았다. 의병군이 관군을 도와주고 공을 관군이 차지한 셈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구원군 즉 의병군은 단천부근에서 계속 적정을 탐색하며 치안확보에 힘썼다. 한편 가또기요마사는 길주성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부장 사사마사모도로 하여금 정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올라가게 하였으며 유소지이에하루란 장수도 군사 약간을 이끌고 북상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병력이동에 대비 단천의 의병군도 서서히 명천을 향해 돌아왔다.

그리고 5일 뒤인 정월 28일에는 백탑교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적은 매서운 추위에 조총도 제대로 쏘지 못한 왜군 전세 급격히 무너져

길주성을 여러겹 포위한채로 임진년을 보내고 계사년을 맞은 의병군은 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할지라도 성중에 대한 연료와 급수, 식량과 마초의 보급 원천을 끊어버리고 성내 수성적군을 성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왜군의 세력은 날로 쇠약해 갔다.

당시 안변부에 본진을 설치하고 있던 가등청정(加藤淸正)은 길주성이 위태롭다는 보고를 듣고 함흥 주둔중의 요장인 과도직무(鍋島直茂)와 의논해 스스로 본진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려 했다. 그러나 한성부에 있던 적군본부로부터 남쪽 한성으로 철수하라는 지령을 이미 받고 있었다. 왜군은 가등청정의 부장인 좌좌정원(佐佐政元)과 과도직무의 부장인 용조사가청(龍造寺家晴) 등으로 하여금 정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북상의 길을 떠나도록 하였다.

이때 왜군은 교묘한 선전공작을 펼친다.

‘맹장 가등청정이 친병을 거느리고 직접 관북지방을 다시 평정하려 북쪽으로 올라간다’는 유언비어를 퍼드린 것이다.

정월23일 단천전투에서 패한 가등여좌(加藤與左)는 망신을 씻어 보려고 벼르다가 뒤따르는 지원군이 북상하자 이와 합류하여 의병군에 압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의병군은 적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서서히 마천령을 넘어 27일 명천부에 돌아와 본진의 정문부에게 적의 이동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살갗을 에이는 듯한 차고 매서운 눈보라 속에 적은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마천령을 넘었다. 이들은 영동관 책성에 있던 적병을 길잡이로 하여 길주성을 목표로 북진해 왔다. 이에 정문부 선생은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3천의 전병력을 모조리 출동시켰다. 27일 저녁에 먼저 매복지에 나가 6백명을 복병으로 배치해 적을 기다리게 해다. 28일 새벽 왜적은 은산과 들에 검광을 번쩍이면서 밀물처럼 올라왔다. 이때 복병장으로 나가서 군사를 잠복시키고 적을 기다리고 있던 구황은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군사들을 숨죽이고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일시에 왜군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화살은 강한 북풍을 타고 날아가 선두부터 차례로 사살하였다. 적은 매서운 추위에 손이 얼어 조총도 제대로 쏘지 못했으며 말들이 어지럽게 놀라 뛰는 통에 전세가 급히 무너져갔다. 박은주(朴銀朱)는 장검을 빼어들고 강문우는 장창을 휘어잡았고, 인원침은 철추를 들고 적중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좌우로 후려갈기고 찍어 죽이고 베어 죽였다.

맹렬히 싸우자 눈 덮인 들판은 선혈로 물들여

삼위의 의병 주력군은 백탑교 부근에서 이 접전의 틈을 타 급히 도망가려는 적의 앞길을 막았다. 전후좌우에서 허리를 찔러 진흙땅이 되어 접전하면서 오전 8시부터 오후6시 사이에 60여리나 추격해 밀고 나아갔다. 10여시간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피아간에 사상자가 많이 나자 백설이 뒤덮인 백탑교의 들녘은 선열로 점점이 붉게 물들어 갔다. 피아의 시체들은 작은 언덕같이 쌓여만 가고 삭풍 속에 부상한 장병과 주인 잃은 말의 울음소리만이 처절하게 퍼져나갔다. 이 전투에서 별장 이봉수는 적장 한명을 활로 쏘아 말위에서 거꾸로 떨어져 죽게 하였으며 백병전에 들어가게 되자 삼지창으로 북호(北胡)를 격멸하던 솜씨를 발휘했는데 의병대장의 군기가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다 도중에 조총에 맞아 아깝게 전사했다.

원충서는 길주성 아래 20리 쯤 되는 것에서 복병을 지휘하고 있다가 돌격을 감행하고 적과 치열하게 접전을 벌여 화살과 탄환이 피아간에 빗발쳤다. 이들은 넓은 지형에서는 협격을 하고 좁은 지형에서는 뒷통수를 갈기면서 맹렬하게 싸웠다. 이성길은 적과 수십보를 사이에 둔 채로 종일토록 활로써 적을 쏘아 죽였는데 길에는 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렸으며 죽은 자들의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적장 사사와 류소지는 종일토록 60여리에 뻗친 야전에서 싸우다가 겨우 퇴로를 헤치고 해질녘 무렵에야 길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까지 추격해온 정문부 선생은 적이 성안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일시에 대거 쳐나올 것을 우려한 나머지 명천쪽으로 일단 후퇴하였다가 다시 좋은 기회를 타보려고 했으나 이를 보고 한인제는 반대했다.

“적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퇴각할 것이오니 여기에서 감시하면서 밤을 새워 적군의 정세를 살피다가 그들이 물러갈 때 쫓아가 격멸함이 좋을까 합니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은 북상한 적이 내일이라도 다시 명천 이북을 향하여 계속 공격을 취할 것이라고 왜적을 과대평가했다.

“허튼소리를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대는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니 그대 혼자서나 그렇게 하시오. 그러나 그대의 군사들은 나를 다라서 같이 가게 할 것이오.”정문부 선생은 노기를 띤 채 이렇게 반박하고 명천으로 갔다가 다시 경성부로 후퇴해버리고 만다.

한인제는 모든 군사를 대장에게 빼앗긴 채 보졸 30여명만 데리고 길주성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 외롭게 잠복해 밤을 지샜는데 과연 이튿날인 29일 아침에 그의 말대로 적은 성안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한인제는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텅 비어 있었으며 다만 병약자 20여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불길은 치솟아 올랐지만 그가 진화작업을 펴 다행히 관사와 곡식창고는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보고를 받고 달려온 정문부 선생은 한인제의 손을 잡고 크게 부끄러워 하면서 사과했다.

“그대가 어찌하여 이렇게도 신명처럼 적의 정세를 판단하고 야간 퇴각을 예언할 수가 있었는가”

길주성을 수복하자마자 한인제는 남쪽으로 퇴각을 시작한 적을 쫓아 일거에 포착섬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은 반대했다.

“북쪽 오랑캐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하니 이제 전력으로 이 적을 쫓는다면 북관이 텅 빌 것이므로 이것이 걱정이오”

그리고는 한인제의 군사를 그에게 다시 돌려주어 그로 하여금 다시 지휘케 하자 한인제는 그의 휘하장병들로서만 적을 쫓아가서 치게 된다. 이로써 의병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마침내 백탑교 전투를 마지막으로 관북지방은 완전히 평정됐다.

하지만 정문부 선생은 의병대장으로서 맹활약을 해 전승의 공이 컸음에도 순찰사 윤탁연의 시기로 인해 그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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