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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자태로 맞아주는 진주 충의사 장군의 가슴 절절한 사연 숨겨져 있는 곳유물전시관, 장판각, 가호서원…의복, 교지, 환도 등 유품(遺品) 보존
마연옥 기자  |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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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18  14: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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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내 마음을 아는 듯 화창했다. 아침부터 조선 최고의 의병장이었던 정문부 선생의 사당, 충의사로 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설레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주에 도착하자 정문부 선생의 후손들인 정술근 전 교장, 정태온 혜림원 이사장, 정수섭 정태진 정종섭 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후손들의 모습에는 정문부 선생의 풍모가 풍겨져 나오는 듯 했다.

선생의 후예답게도 점잖으면서도 단정하고, 교양이 넘쳤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유독 교육자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우리 일행은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로 향했다.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가는 길에 후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가 아니라 유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종교가 아니라 학문의 영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유학으로 불리웠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도 공자의 학문을 유학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무엇보다 종교의 필요한 요소인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엄연히 학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유교라고 불리게 된 배경에는 ‘성균관의 OO 교수’가 1970년대에 유학을 종교단체에 등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유교라고 쓰기 시작했다고 덧붙여 말했다.

충의사는 단아한 자태로 우리를 맞아들였다. 충의사는 정문부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단층 목조기와 집으로 이곳에는 의복(衣服) 교지(敎旨), 환도(還刀) 등 선생의 유품(遺品)이 보존되어 있다. 경내에는 정문부 장군의 유물전시관, 장판각, 가호서원(佳湖書院)이 있다.

충의사는 박정희 대통령 때 장군의 공을 기려 진주시 귀곡동에 세워졌으나 남강댐 숭상공사로 인하여 1995년 귀곡동에서 현재 용암리의 장소로 이건됐다.

후손은 “박정희 대통령이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있고 육지에서는 정문부 장군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 공을 높이 샀다”고 전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충의사’라는 휘호를 내렸다는 것이다.

정문부 선생의 사당이 진주에 있게 된 배경에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큰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받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충신의 가슴 절절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

   
 
정문부 선생은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선의 왕자들을 왜의 키요마사에게 넘기고 항복했던 국경인의 난을 진압하고 능수능란한 작전을 구사하며 수차례 가토 키요마사의 왜군을 격파하고 관북지방을 수복했다. 조선을 침공했던 왜장 중 가장 악명이 높았던 자가 바로 그 가토 키요마사였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의병장으로서 세운 전공을 당시 조정대신의 농간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의병장의 신분으로 크게 활약한 정문부 선생을 순찰사 윤탁연(尹卓然)이 시기 질투로 조정에 정문부 선생의 공을 반대로 고했다. 또 윤탁연은 조정에서 실사를 보낸 사신에게도 뇌물을 주어 진상 조사를 무마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제대로 포상을 받지 못했고 영흥부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정문부 선생은 온성부사, 길주목사, 안변부사, 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 판결사, 호조참의가 되었고 rmm해 중시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600년 용양위부호구,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 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2)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했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가 이괄(李适)이 일으킨 반란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아들에게 이전에 창원부사에 있으면서 진주의 자연과 인심에 끌려 자주 찾았다며 후손들에게는 다시는 벼슬을 구하지 말고 진주로 내려가 터를 잡고 살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때 나이 60세였다.

사후 41년(현종6)이 지나서 신원되어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좌찬성 대재학으로 추증되었다. 충의공 시호와 부조전이 내려 경성 창렬사와 청암사, 해방 후에 진주 충의사와 의정부 충덕사에서 제향을 한다.

   
 
충의사에 들어서면 이 사당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세상에 적은 공으로 상을 받는 이도 있으되 큰 공을 세우고도 댓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박해로 슬픈 최후를 마친 이가 계시니 문무 겸비한 농포공 정문부 선생이 바로 그 이시다. 공은 일찍 명종 20년 2월 19일에 나시어 27세에 함경북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나가 이듬해 28세 때에 임진란을 만났던 것이다. 그때 내란을 일으킨 반역자들을 소탕하는 한편 북으로 쳐들어간 억센 왜적들과도 싸워야 했고 또 틈을 타 침구하는 오랑캐들까지 무질렀었다.

황막한 변방에 깃발을 꼿고 바람같이 달리면서 같은 때에 한 칼을 들고 삼중천투를 감행하여 모두 대승첩을 거두었으니 어찌 그리 장하던고 임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숨어 살다가 인조 때 원수의 지위에 추천되기까지 했으나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나갔더니 인조 2년 11월 19일이었고 향년은 60세, 원통한 공의 죽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것이랴.

몸은 그같이 가셨지마는 공로는 숨길 수 없어 숙종 때 충의의 시호를 내려 보답해 드렸다. 농포 정공이야말로 국경수호의 3대 영웅이라 정부는 후손 세거지인 이곳에 사당을 중건하고 공을 추모하며 공의 행적을 적어 비를 세운다.

1980년 3월 노산 이은상 짓고 고천배 재식 쓰다- 이렇게 비 뒷면에 쓰여져 있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탈취되어 반환된 북관대첩비의 모형이 자리잡고 있다. 장판각에는 정문부 선생의 문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유물전시관은 정문부 선생의 공적을 유물과 그림, 도표, 모형, 영상으로 전시하고 있다, 관복과 장검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모조품을 전시되어 있다.

   
 
촉석루에 해주정씨 관련된 유적 유물만 8여 가지

일행은 진주 촉석루로 이동했다. 영남의 요새인 진주 중심부의 남강 절벽 위에 위치한 진주성(사적 118호)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이다. 성내 촉석루에는 의암과 쌍충각, 김시민 장군비 등 많은 문화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치 또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남강과 절벽과 연못을 두른 천연요새로서의 입지를 갖춘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1차 진주성 싸움(1592년)에서 6일간 3800명의 군사로 왜적 2만 여명을 물리친 김시민(金時敏)의 진주대첩과, 이듬해 계사년(1593년) 전투에서는 10만 왜적을 9일간 혈투에서 삼장사를 비롯한 7만 군‧관‧민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전투의 현장이다.

성내에는 해주정씨(海州鄭氏)와 관련된 유적 유물 작품이 정문부 선생의 시를 비롯해 8가지가 있다.

촉석루에는 정문부 선생을 비롯한 대표적인 시인 학자 9분ㅇ의 시가 남아 있다. 정문부 선생의 시는 54세 때 창원 부사 시절 진주에 들렸다가 의병장으로서의 남다른 감회로 진주성 싸움을 읊은 시다.

   
 
次 矗石樓韻 촉성루 시에 차운하다

龍歲兵焚捲八區 임진년 병화가 전국을 휩쓸어

魚殃最慘此城樓 느닷없이 입은 참화 이 성루가 제일 컸네.

石非可轉仍成矗 돌은 구를 수 없이 우뚝하게 솟았는데

江亦何心自在流 강물은 무슨 마음으로 흐르고 있나

起廢神將人共力 신명은 사람과 함께 퇴폐함을 복구하려 하고

凌虛天與地同浮 무한한 공간은 땅과 같이 떠있네.

須知幕府經營手 알겠구나 막부의 경영하는 솜씨가

壯麗非唯鎭一州 한 고을만 진압하지 않으려는 장한 뜻임을.

예로부터 사우나 정자 등 건물을 지을 때나 수리할 때 뜻과 정신이 담긴 내력을 쓴 기문을 걸었는데, 명망 있는 분의 글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촉석루는 창건 이래 760여년 동안 왜구침입, 임진왜란, 6.25로 3번 소실되어 재건했으며 5번 중수했다.

명암선생은 1683년(숙종 9)년에 농포공의 동생 용강공의 증손이다. 명암 정식(明菴 鄭拭)의 중수기는 영조 즉위년인 1724년 중수시에 지은 것으로 당시의 해주정씨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1629년(인조 7)년 유림들의 중론으로 명필로 이름난 농포공의 둘째아들 승지 대륭(承旨 大隆)공이 바위의 서쪽 면에 전서로 <義菴>이라 쓰고 새겼는데 강과 누각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어 진주 8경으로 꼽힌다.

논개의 업적을 기록한 의암사적비(義菴事跡碑)가 있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경 유몽인(柳夢寅)이 슨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됐다. 1722년(경종 2)에 명암공이 어우야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어 사적비를 세운 것이다.

獨峭基巖 홀로 뾰족한 그 바위,

特立其女 우뚝이 서 있는 여인.

女非斯巖 여인은 이 바위 아니면,

焉得死所 어디서 죽을 곳 얻으랴?

巖非斯女 바위는 이 여인 아니면,

烏得義聲 어떻게 의롭단 소리 들으리?

一江高巖 한 줄기 강의 높은 바위,

萬古芳貞 만고에 꽃답고 곧으리라.

마연옥 기자  k-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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